-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명화와 역사] 35,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대공황의 시대였던 1930년대는 또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의 세가지 이념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정이 역사를 움직인 세대였고, 이러한 시대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스페인이었다. 20세기 초반 스페인은 노동문제, 농업문제 등으로 사회적,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였고,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공화파가 정권을 잡았다가 실각하고 다시 극우 팔랑헤당이 파시즘 독재를 꿈꾸며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6년에는 사회당 계통의 인민전선이 다시 집권하면서 정치범 석방, 농민 조세 경감, 노동자 임금인상과 교육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들을 단행하게 되었다. 또한 극우 팔랑헤당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프랑코 장...군을 카나리아제도 경비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던 중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코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프랑코의 아프리카 반란군이 스페인 본토 상륙이 성공하면서, 스페인은 둘로 나뉘어 반란군을 지지하는 우파 세력과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좌파 세력간에 서로를 증오하고 살육을 벌이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전쟁 초기부터 온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소련과 멕시코는 좌파 세력인 공화국 정부군을 지원하였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우파 세력인 반란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스페인의 공산화를 두려워해 중립을 유지했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면서,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참여한 50여개국 출신의 의용군으로 이루어진 4만여명의 국제여단이 공화국 정부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게는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세력과 파시즘 세력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공화국 정부의 승리는 곧 유럽 반파시즘 전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들은 파시즘을 막으면 당시 유럽을 짖누르고 있던 세계대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불후의 명저 ‘누구를 위하여 종은 물리나’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내전 초기에 프랑코의 반혁명군(반란군)은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로부터 물자, 병력, 무기 등을 지원받아 승승장구하였지만, 국제여단과 마드리드 시민들이 완강하게 버틴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마드리드 함락에 실패함으로써 내전은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국제여단의 피해는 상당했다. 더욱이 이들은 서로 다른 국가에서 왔기에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원할치 못해서 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혁명을 지킨다는 소신으로 굳게 버텼다. 하지만 혁명세력의 아성이었던 카탈루냐가 프랑코군에 넘어가자, 국제여단은 스페인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들이 완전히 철수한 1939년 2월,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방의 게르니카라는 작은 도시에 4시간 동안 50톤에 이르는 폭탄을 투하한 독일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있었다. 프링코는 독일 히틀러에게 군사지원요청을 하였고, 히틀러는 새로 창설중인 독일 공군의 신병기 실험장으로 스페인을 이용하자는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날 독일 공군의 신병기들을 시험하는 날로 삼은 것이다. 독일 공군의 폭격 및 기총 소사로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 아비규환이 되었고, 이 사건으로 1,600여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파리에 있던 화가 피카소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받고 구상중이었다. 그러던 중 게르니카 폭격 소식에 분노한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을 주제로 하여 한 달 만에 작품을 완성하였다.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는 흑색과 회색의 무채색이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핏빛인 붉은 색은 사용되지 않았다. 어린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상처입고 울부짖는 말, 찟어진 깃발과 부러진 칼, 무심한 소의 눈빛 등을 표현한 이 그림에서 피카소는 전쟁과 파시스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에 의해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고국 스페인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게르니카>는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게르니카 (Guernica)> (1937), 349.3X776.6cm,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 게리 쿠퍼,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1943년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https://www.youtube.com/watch?v=T2aRQu3G-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