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샘 Aug 09. 2019

[명화와 역사] 40, 독소전쟁과 스탈린그라드

- 레나토 구투소 <전승>

[명화와 역사] 40, 독소전쟁과 스탈린그라드 (1942)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파죽지세의 승리로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유럽 대륙을 점령한 히틀러는 이제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은 수많은 전투기와 폭격기로 영국 공습을 감행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기는 하였지만, 영국은 아직까지 명성이 남아있던 해군과 공군의 활약으로 공습을 막아내고 있었다.

영국 공습이 지지부진해지자 히틀러는 1941년 6월에 정반대 방향의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전쟁을 계속하려면 소련의 곡장지대인 우크라이나와 석유 산지인 코카서스 지역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당시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오판하고 있었다. 유럽 중서부 전선에서 싸우기 바쁜 독일이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침공해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대비를 못한 소련군은 독일의 전격 공습에 의해 초전에 2,000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전선의 포탄창고와 보급참고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130년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2개월 이내에 소련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었다. 이태리, 헝가리, 푸마니아 등 추축국 병력을 포함하여 300만명의 병력으로 2천킬로미터가 넘는 소련과의 전선에 세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한 북부집단군,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중부집단군,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 유전지대를 목표로 한 남부집단군이었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소련은 독소전쟁을 ‘대조국전쟁’으로 명명하며 결사항전에 나서게 되면서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개전 초기 일방적으로 밀렸던 소련은 명장 주코프에 의해 900일동안 레닌그라드 포위작전을 방어해 내였고, 모스크바 공방전도 독일군의 보급부족과 겨울추위로 대치상태에 묶어 둘 수 있게 되었다. 양측 합쳐 약 800만명의 대군이 팽행히 맞선 1942년부터 독일군은 유전과 곡창지대를 확보할 수 있는 남부전선에 노골적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드디어 독소전쟁의 흐름을 극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바쿠의 유전지대로 가기 위해서는 굳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안하고 우회해도 되었지만, 전선이 길어지면 소련군의 역습으로 전진부대가 고립되는 것을 우려해 중간지대인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갑자기 목표를 바꾼 독일군의 총력전이 벌어진 것이다. 남부집단군을 둘로 나누어 A집단군은 바쿠유전으로 진격하고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한 것이다. 하지만 원래 도시 이름이 차리친이었던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로서 소련 기계공업의 중심지이자 스탈린의 자존심이었기에, 총력전으로 방어에 나선 소련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시가전 초기에 도시를 점령했던 독일군은 겨울이 되면서 보급이 끊기며 포위되며 고립되었고, 현지 사령관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 의해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국 여섯 달 동안의 사투 끝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독일군을 포함한 추축군은 6개월 동안 50만의 전사자를 포함해 무려 150만명의 인명피해를 보았다. 포로가 된 9만명도 대부분 포로수용소에서 각종 질병과 노역으로 죽어갔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5천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리한 소련의 피해는 독일보다 더 커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150만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약 300여만명 이상이 인명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주도권을 잡을 소련군은 1년후에는 레닌그라드를 탈환하고, 이후 지상 최대의 전차전이라 일컬어지는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승리한 여세를 몰아 독일 점령하의 동유럽 국가들을 탈환하면서 서진을 계속하여 1945년에는 베를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세계 전쟁사에 영원히 기억될 만큼 인류 최대, 최악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참혹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승패를 떠나 인류사의 최대 비극중의 하나였다.


이 그림 <전승>을 그린 이태리 출신 화가 레나토 구투소는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때에 빨치산으로 참전하여 나치에 맞서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잔인하고 참담했던 전쟁의 실상을 그림에 담았다. 전후에 사회참여적인 주제와 사실주의 화풍을 발전시키던 구투소는 피카소를 차용하여 아방가르드와 결합시켰다. 중앙에 있는 말은 공포감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묘사된 말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고, 나치 헬멧 아래에는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동물에서 보이는 잔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 들고 걸어나오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당시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2차대전 독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행방불명된 이태리군 남편을 찾아 우크라이나로 찾아나선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 (1970년)

https://www.youtube.com/watch?v=BvwSctFUJNY


*** 독소전쟁의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서 저격수들의 활약을 그린 주드 로 주연의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 (2001년)

https://www.youtube.com/watch?v=4O-sMh_DO6I

****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상을 그린 토마스 크레취만 주연의 영화 ‘스탈린그라드’ (2013년)

https://www.youtube.com/watch?v=l5q8yiXK69I


++ 레나토 구투소 (Renato Guttuso, 1912~1987) <전승 (The Triumph of War)> (1966년), 126x186cm, Guttuso Collection, Rome


이전 18화 [명화와 역사] 39, 진주만과 미드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