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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Aug 22. 2019

[명화와 역사] 41, 우생학과 홀로코스트

- 데이비드 올레레 <산자들을 위한 사자들의 음식>

[명화와 역사] 41, 우생학과 홀로코스트


1859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유전이 중요시 되었고 유전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1866년에는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하면서 20세기 들어와 유전의 과학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범죄 원인을 진화론 관점에서 풀어보려는 시도도 생겨나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사촌 동생인 생물통계학자 프랜시스 갈톤에 의해 나쁜 형질의 유전을 최소화 하고, 좋은 형질의 유전을 극대화 하려는 우생학(優生學)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품종개량 등 인류에 유익한 분야로 발전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우생학은 독일로 건너가면서 인종우생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종우생학은 유전과 환경을 조절하여 인종을 개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분야인데, 열등한 인종이나 장애인들을 제거하여 우수한 인종만 남게 하려는 인권을 도외시한 학문이었다. 또한 19세기 이후 '골상학(骨相學)'이라는 사이비 학문이 유럽을 휩쓸기도 하였다. 인간은 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그 뇌가 모여 있는 곳이 두개골이므로, 두개골이 튀어나오고 들어간 생김새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환경을 무시한 채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면서 왜곡된 주관적 이론을 만든 것이다.골상학도 우생학과 연결되면서 인류사의 비극을 낳았다. 20세기초 독일의 법률가 칼 빈딩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을 국가위원회에서 결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유태인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배타시 되어왔는데, 1894년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프랑스의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 스파이로 모함을 받고 유죄가 된 드레퓌스 사건은, 이후 진범이 나타났음에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재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드레퓌스는 오랜 법적 투쟁 끝에 1906년 억울한 누명을 벗었으나 당시의 우생학과 유전이론은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고달프게 했다. 인종주의와 선민의식 등이 우생학과 연결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화했고 일부는 극단적 행태로 치달았다. 히틀러의 범게르만주의가 대표적이었다. 인종청소, 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의 바탕에는 과학처럼 포장한 비과학 이론이 깔려 있었다. 


독일 인종우생학은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가속화되었다. 드디어 1932년 독일 정부는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해서 '부적격자'를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그 다음 해에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강제 규정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1934년부터 독일에서는 30만 명의 허약자들이 거세당했다. 우생학자들은 불치병을 앓거나 정신병자, 백치, 정신박약자, 불구자, 동성연애자의 삶을 ‘살 가치 없는 삶’으로 구분한 뒤에, 국가가 이들을 안락사 시킬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고귀한 피를 유대인의 범죄적 피로부터 지키겠다며 유태인을 타켓으로 삼아 수백만 유대인을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당시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하고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벌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러한 잘못된 인종차별주의의 대표적 사이비 학문인 우생학의 영향도 컸다. 물론 당시 유대혐오주의는 독일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고 유럽 전반에 퍼져있는 분위기였다. 유태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 하여 유럽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태인을 싫어하였다. 또한 유태인들은 고리대금업 등의 돈이 되는 업종에 주로 종사하면서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히틀러는 독일민족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을 확보해야하고, 이를 위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인종 청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폴란드, 우크라이나와 발트3국 등을 점령하면서 이런 야욕을 실현해 나갔고, 이들 동유럽 국가들에는 히틀러가 그렇게 혐오하는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이들을 큰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는 방법을 취하였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별도의 수용소에 수용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폴란드의 6곳의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이들 수용소는 가스실을 설치한 절멸수용소로서 당시 유럽 유태인 1,100만명중 약600만명이 희생되었다. 유태인 이외에도 집시, 장애인,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용소 중 가장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의 고도 크라쿠프 서쪽 50Km지점에 위치해있는데, 1941년부터 운영하여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출신국가별로 막사에 수용된 채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인체실험 등을 당하여 희생자가 400만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3분의 2가 유태인이었다. 1945년 1월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감추기 위하여 막사를 불태웠지만,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여 막사의 일부가 남게 되어, 이후 박물관이 건립되어 인류 최대의 광기의 현장을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5월에 히틀러는 자살하고,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하게 되면서 드디어 인류역사상 최악의 대량살상전쟁이었던 2차세계대전도 막을 내렸다.


폴란드 출신 프랑스의 유태인 화가인 데이비드 올레레는 당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다. 1943년 3월에 파리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강제 수용되었다. 다행히도 그는 수용소에서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을 화장장에서 태우는 일을 하게 되어, 아우슈비츠 극소수의 생존자 가운데 한명으로 살아남은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참혹한 경험을 그림과 글로 증언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의 악몽을 생생하고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공포에 질린 표정의 저 남자는 바로 그 자신으로, 가시철조망 너머 여자수용소로 던지기 위해 화장장 근처에서 버려진 음식물들을 주워 모으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팔뚝에 있는 번호는 그의 실제 수용수 번호였다고 한다.

++ 데이비드 올레레 (David Olère, 1902 ~1985), <산 자들을 위한 사자의 음식 (The food of the DEad for the Living), 판지에 유채, (1942~1962년), 76x102cm, 뉴욕 유대인 문화유산 박물관


* 2차대전 때에 수용소에 갇히는 유태인을 구출하는 사업가 쉰들러의 감동적인 이야기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1993년)

www.youtube.com/watch?v=GN18VBVG1b0


**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간신히 폴란드에 남아 생존하는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그린 실화 영화 ‘피아니스트’ (2002년)

www.youtube.com/watch?v=O8R7vuRwInE


*** 수용소에 갇힌 비극적 현실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코믹적으로 묘사한 아름다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1999년)

www.youtube.com/watch?v=LC903Lkok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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