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불어오는지 바람이 살랑이면서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마치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처럼 온통 파란색이었다. 8월의 후커 호수 주변은 가을 날씨처럼 쾌청하기 그지없어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청명한 공기가 온몸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오늘 같은 날씨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날씨였기에 형우는 행운을 잡은 것 같았다. 숙소에서 자동차로 3시간을 넘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세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호수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설산을 연신 카메라로 찍어댔다. 바람이 장난치듯 세현의 머리카락을 애교 있게 헝클고 지나갔다.
후커 빙하 호수는 마운틴 쿡 바로 아래 있는 호수다. 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려 고인 빙하 수는 남쪽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수의 물은 빙산과 산에 쌓인 눈이 녹아내려 에메랄드빛에 하얀 진주가루를 섞어 버무려 놓은 듯 연한 옥색으로 찰랑거렸다. 호수 위로는 여러 개의 빙하 조각이 둥둥 떠 있었고 유빙의 크기 또한 실로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이어서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형우는 수십만 년 된 빙하를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세현과 단둘이서 후커 호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두 달 전, 형우는 세현의 부모님을 만났었다. 서로 호의적인 만남이 아니라 형우의 존재를 알아차린 세현이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호출을 당한 것이었다. 형우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세우던 세현 엄마의 눈초리는 한 겨울에 불어대는 매서운 바람보다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형우의 가슴을 후벼팠다. 세현은 비에 흠뻑 젖어 파닥거릴 수도 없이 지쳐버린 작은 새처럼 형우 옆에 앉아 있었고, 형우는 그런 세현 옆에서 서리 내린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걸을 때의 통증을 느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세현의 부모님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해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해댔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세현은 형우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이미 자신은 성인이기에 부모님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며 결혼을 서두르자고 했다. 하지만 형우는 세현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막 여고생이 된 민희와 중3인 찬이가 엄마는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세현의 존재를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부딪힌 세현과 형우는 탈출구로 방학을 이용해서 어렵사리 뉴질랜드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형우는 만년설이 흘러내리는 후커 호수 앞에서 세현에게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남들처럼 축복받는 결혼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향해 있는 세현을 더 이상 홀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헤쳐나가야 할 문제들은 차후의 일이고 지금은 세현과 자신이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확고 믿음이 있었다. 이런 형우의 계획을 전혀 알길 없는 세현은 그저 둘만의 시간, 둘만의 장소가 되어 있는 후커 호수 앞에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호수 위로 반영된 설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자기야! 우리 호수의 물에 손 담가 볼까?“
”아.... 그럴까요? 호수의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저도 궁금하긴 했어요.“
형우는 풍경에 한껏 취해있는 세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호숫가 주변으로 넓게 늘어서 있는 거뭇한 돌멩이를 밟으며 지나가자 발밑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가에 다다르자 맑고 투명한 물이 수많은 돌멩이 위에서 찰랑거렸다. 세현은 허리를 구부리더니 형우보다 먼저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으악~ 자기야! 이건 정말 얼음 물이에요."
“어이쿠! 호수에 잠시 손을 넣기만 했는데도 정신이 번쩍 나는 걸?”
“조금만 더 담그고 있으면 동상에 걸릴 것 같아요.”
더 이상 물속에 손을 담글 수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크로스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는 세현에게 형우가 말했다.
“자기야! 그래도 호수 물에 손을 조금만 더 담그고 가면 안 될까?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을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만져볼 수 있겠어.”
“음.... 그럴까요?”
세현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형우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에 두 손을 다시 들이밀었다. 맑고 투명한 물속으로 하얗고 가는 세현의 손가락이 굴절되어 작게 보였다. 세현은 고개를 들어 호수 맞은편으로 보이는 설산은 바라봤다. 하얀 눈이 덮인 산은 건장한 청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산 아래로 녹지 않고 영원할 것 같았던 만년설이 녹아내려 호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 앞에 놓인 매서운 현실 또한 언젠가는 녹아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현이 물속에 손을 담그고 주물 거리고 있는 동안 형우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얼른 손아귀에 넣은 다음 세현 옆으로 다가갔다.
“어? 물속에 뭐가 있네?”
형우는 물속에서 뭔가를 주운 듯한 표정으로 주먹을 펴 보이며 세현의 손에 건넸다.
“어머? 이거 목걸이 아니에요? 이게 정말 호수 속에 있었어요?”
“하하하. 글쎄.”
“에이~ 뭐예요.”
“자기 주려고 내가 준비한 거야. 세현아 우리 결혼하자. 결혼식은 화려하게 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그냥 같이 살자.”
“이제야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아이 몰랑~”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세현이 앳된 소녀가 되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형우는 세현의 희고 가는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세현의 가슴 뛰는 소리가 형우의 가슴으로 전해지자 형우의 심장에서 더운 피가 빠른 속도로 내리 달리며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백금으로 된 목걸이는 세현의 목에서 더욱 하얀 빛을 뿜어내며 반짝거렸다. 목걸이 줄에 매달린 작은 별과 달 펜던트가 세현이 움직일 때마다 서로 살을 비비듯 스치며 마주쳤다. 형우는 세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제아무리 시린 일들이 휘몰아친다 해도 까만 밤 하늘의 달과 별처럼 언제나 함께 하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