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하다
”크르릉 쾅쾅 우당탕!“
하늘이 무섭게 울면서 세찬 바람과 함께 폭우가 우악스럽게 쏟아져 내렸다. 자동차 유리를 와이퍼가 신나게 닦아내고 있었지만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세현은 도로 위에 덩그러니 혼자 있었다. 차를 멈추고 비를 피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어둠과 함께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이 더 힘들 것 같았다.
공포는 칠흑 같은 어둠이나 막연한 두려움이 겹칠 때 극대화되고 확대되기 마련이다. 세현은 어깨를 짓누르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운전대를 꼬옥 부여잡고 전방을 주시했다. 반대편에서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현은 자신이 어디를 가기 위해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억수로 내리꽂는 빗줄기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앞쪽에서 다가오던 자동차 불빛이 세현에게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쾅!“
세현은 눈을 번쩍 떴다.
”휴~“
새벽 다섯 시였다. 꿈속에서 상대편 차와 부딪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서 마치 맨발로 뱀을 밟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흘러내렸다. 형우에게 전화를 걸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오른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거실로 나왔다. 벽면에 붙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히니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두려움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추르르르~“
정수기 받침대에 투명한 유리컵을 올리고 물을 받았다. 정수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거실의 고요함을 흔들어 깨웠다. 물을 두어 모금 들이켜고 커튼을 걷어 젖히니 어둠 속에 등대처럼 빛나고 있는 불빛이 보였다. 세현은 맞은편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불을 켜는 작은 행위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오후에 있는 형우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세현은 오늘 형우의 집에 가기로 했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와 결혼을 위해 처음 시도하는 일이 민희와 찬이를 만나는 일이었다. 형우는 조금 빠른 것 같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세현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며 서둘렀다. 이 문제만큼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었던 마흔의 마음이 저돌적인 스물다섯 청춘에게 밀리고 만 것이다. 형우도 세현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뭉그적거리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아비의 마음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맞부딪쳐서 해결해 나가자는 세현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매사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세현이었지만 민희와 찬이를 만난다는 생각에 오전 내내 거실을 서성거리다 집을 나섰다. 소라색 셔츠에 연한 회색 바지를 입은 세현은 빵집에 들려 프랑스 버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쉘린 플레인을 샀다. 커다란 소라 모양에 1센티 정도되는 초콜릿 띠가 돌돌 말린 쉘린 플레인은 민희가 좋아하는 빵이라고 했다. 찬이가 좋아한다는 바나나 케이크도 샀다. 노란 카스텔라 가루가 보드랍게 묻어 있는 바나나 케이크는 세현도 좋아하는 빵이었다. 세현은 빵집 아가씨가 빵을 포장하는 동안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들을 민희 찬이와 함께 나누어 먹는 상상을 했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들떠있었다. 여기저기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연인들의 웃음소리,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를 따라가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젊은 부부,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고 걷고 있는 중년의 부부 등등 모두가 파티에 초대되어 가는 커플들처럼 표정이 밝아 보였다. 세현도 덩달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형우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걸었다. 단정하게 한갈래로 묶은 머리가 세현의 등 위로 시계 추처럼 달랑거렸다.
"자기야!"
"어머 일찍 왔네요?"
"아니야. 나도 방금 전에 왔어."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얼굴 표정이 왜 이리 어두워요?"
"별일 아니야."
"에이, 말해봐요. 무슨 일 있는 거죠?"
"그게.... 자기가 집에 온다고 했더니 아이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특히 찬이가..."
"음... 아이들한테 처음부터 환영받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오늘은 가볍게 인사만 해야겠네요. 저는 같이 점심 먹으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식사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면 되죠 뭐."
"현아 고마워! 자기 말대로 오늘은 아이들과 인사만 하고 나와야겠어."
"알았어요. 제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쉘린 플레인이랑 바나나 케이크 사 왔어요."
세현은 빵이 담긴 종이 백을 번쩍 들어 올리며 형우를 향해 활짝 웃었다. 함박꽃처럼 환한 세현의 미소에 금세 전염된 형우도 싱긋 웃더니 세현의 손을 잡고 에너벨리 타워를 향해 걸었다. 형우의 집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에너벨리 타워 안에 있었다.
"형우 씨! 이렇게 으리으리한 곳에 살고 있었어요?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여기에 사는 이유는 나중에 말해 줄게."
"와~ 저 놀랬잖아요. 집에 간다면서 왜 호텔로 데려가는가 하고요."
"아래층은 호텔인데 40층부턴 아파트야. 미리 얘기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아이들 때문에 신경 쓰다 보니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어."
80층이 넘는 에너벨리 타워에는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집값은 층마다 달랐지만 최소 백억에서 4백억이 넘는 집도 있었다. 한 달에 내는 관리비만 해도 5백만 원이 넘었기 때문에 금수저를 지닌 사람들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세현은 빛의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 몸이 움츠러들었다.
엘리베이터는 52층에서 얌전하게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바닥에 커다랗게 박힌 베들레헴 스타 문양이 눈에 띠였다. 복도를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가니 크림색으로 펼쳐진 집안의 분위기가 현대적인 느낌이어서 세련되어 보였다. 어림잡아도 100평이 넘는 듯한 형우의 집은 바닥에 미색으로 된 대리석이 깔려 있어 번들거렸다. 거실 중앙에는 연한 살색의 라운드형 패브릭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소파 옆으로 놓인 수족관에는 화려한 열대어들이 꼬리를 살랑 흔들어 대며 춤을 추었다. 소파 맞은편으론 몸집이 큰 파키라와 해피 트리가 나란히 창가 옆에 서서 햇빛 샤워를 하며 반질거렸고 가로로 기다란 티브이가 벽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얘들아! 인사드려야지."
형우가 멀뚱하게 서 있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종용하자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느라 세현이 나서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 네가 민희구나? 너는 찬이고? 난 박세현이라고 해"
세현은 들고 있던 빵 봉지를 민희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민희가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하자 찬이는 아무 말 없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민희와 찬이는 이란성 쌍둥이였다. 찬이는 형우를 닮아서 키가 작고 두상이 작았다. 둥그런 이마 밑으로 숱이 많아 짙어 보이는 눈썹이 양쪽으로 적당히 벌어져 있었다. 미간이 제법 넓게 벌어져 있는 것을 보면 무던한 성격 같아 보였지만 세현 앞에선 뚱한 표정으로 심술부리는 사내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속쌍꺼풀이 진 눈은 눈썹 밑에 깊숙이 박혀있었고, 나지막한 코, 얍실하면서도 작은 잎은 영락없이 곱상한 형우의 어린 모습 같았다. 민희는 찬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덜 익은 복숭아처럼 볼은 탱탱하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했지만 입이 앞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었고 입꼬리가 꽃잎처럼 살짝 올라가 있었다. 노래를 잘 부른다더니 꼭 다문 입술이 성악가들처럼 크고 길었다.
"얘들아! 잠깐 소파에 앉자."
소파에 앉던 형우가 아이들에게 손짓을 하자 민희가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찬이는 휭하니 제 방으로 들어가 철컥 문을 잠가 버렸다.
"아니 저 녀석이"
세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형우가 찬이 방으로 다가가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찬아! 문 열어 봐! 어서!"
"........"
방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형우는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치며 찬이의 방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너 문 안열거야? 그럼 내가 열쇠로 열고 들어간다?"
"에이~C, 왜 그래요. 아빠가 인사만 하라매. 그래서 내가 했잖아. 근데 뭐, 뭐가 잘못된 거냐고. 흐엉~"
찬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내동댕이 치는지 방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표정없이 서 있던 민희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자기야! 그만해요. 오늘은 인사만 하기로 했잖아요. 이제 우리 그만 나가요. 민희야! 오늘은 이만 갈게. 다음에 또 만나자. "
세현은 형우의 손을 이끌고 현관 쪽으로 나가면서 민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가세요."
민희는 그렁그렁 해진 눈을 깜박이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세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