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결혼을 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쉽지 않을 텐데요. 서로의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오래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도 필요할 거예요.”
세현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던 상담사가 단호하면서도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상담사는 직업상 세현의 마음을 이해하는 척했지만 속으론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아가씨가 왜 쉽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도 물론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지난 토요일에 찬의 행동을 보면서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하지만 노력해 볼 수 있는데 까지는 노력해 보고 싶어요. 제가 참을성은 많거든요.”
“찬이라는 아이 때문에 많이 놀랐나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세현 씨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단지 쉽지 않은 길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아이들과 가까워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선생님에겐 많은 사례가 있으실 테니 도움받고 싶어요.”
“케이스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은 유사성의 원리와 상호성의 원리를 잘 활용하면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유사성과 상호성의 원리라고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세현은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며 상담사의 금테 안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유사성의 원리는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상호성의 원리는 자신에 대해서 좋게 얘기하고 인정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으니까 유사성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호성의 원리를 잘 실천하면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시간이야 걸리겠지만요.”
세현은 작고 붉은 입술을 꼭 다물며 상담사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앞으로 제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히는 것 같아요.”
“세현 씨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 보입니다. 저 같으면 도망쳤을 거예요.”
상담사는 세현을 칭찬하는 것 같았지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감사해요. 선생님! 사실 형우 씨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가 이런 생각까지 했겠어요.”
“그러네요. 사랑의 힘이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상담사는 콧등 위로 흘러내린 안경을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 올리더니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세현 씨! 오늘은 이만 시간이 다 되어서 마쳐야겠습니다. 다음 주에도 오시겠습니까? 오시려면 밖에서 예약시간 잡고 가세요.”
“아니요. 마음이 답답했는데 오늘 많이 해소되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유사성과 상호성을 실천해 보면서 또 힘들어지면 그때 다시 올게요."
"그러십시오. 아이들과도 보다 발전적인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아 참 세현 씨! 궁금해서 그러는데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그건......"
세현이 말끝을 흐리자 상담사는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가 상담사에게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자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내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만두처럼 볼록한 핀코 핸드백을 왼손으로 집어 들고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상담을 받고 난 후로 세현은 민희와 찬을 두 번 더 만났다. 한 번의 만남에서 민희는 얌전한 아가씨처럼 말 수가 없었고, 찬이는 여전히 세현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찬이 첫 만남에서처럼 무례하게 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이들과 두 번째 만남은 피아노 연주회가 있었던 예술의 전당에서였다. 형우는 아이들과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세현을 보며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세현아! 예술의 전당에서 조성진 독주회가 다음 달 초에 있다는데 다 같이 갈까?”
“어머 그래요? 근데 티켓을 쉽게 구할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그럼 자기랑 나랑 한번 노력해 볼까요? 아이들도 음악회 좋아한다면서요.”
“으응.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회를 많이 다녔지.”
“그래요? 저도 피아노 연주회 너무 좋아하는데 다 같이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세현은 연주회에 같이 가자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마치 티켓을 이미 손에 거머쥔 것처럼 좋아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6월 3일 토요일 밤 7시 30분. 세현, 형우, 민희, 찬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C 구역 4열 중앙에 나란히 앉았다.
아레나형으로 이루어진 콘서트홀의 웅장함과 섬세한 분위기는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클래식한 콘서트홀의 천장에 높이 달린 불빛은 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콘서트홀 자리가 메워지고 연주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65분간의 공연 시간이 쉬이 지나가고 몇 차례의 커튼콜 끝에 무대로 다시 나온 피아니스트는 쇼팽의 짧은 녹턴 한 곡을 치기 시작했다. 녹턴 No2였다. 연주자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건반의 앞뒤로 이동하며 천천히 "따라 라라라라"로 시작되는 선율은 꿈결 같은 기분을 오롯이 느끼게 해 줄 만큼 감미롭고 차분했다. 마치 하얀 날개를 단 천사가 내려와 피아노 건반 위를 유유히 걷다가 종종걸음 치듯 가볍게 걷는 것 같았다. 녹턴 Opus 9번에서 두 번째로 연주되는 이 곡은 세현도 피아노를 배울 때 연주하고 싶었던 워너비 곡이었다.
맑고 청하 한 멜로디가 이어지다가 변주되는 절정 부분에서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건반을 때려 부수듯 두 손으로 힘껏 두드렸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몰입감에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찬 콘서트홀은 쥐 죽은 듯 고요하면서도 휘몰아치는 울림 속으로 청중을 몰아 챘다. 긴 호흡으로 점점 여리게 손가락에 힘을 빼는 연주의 끝부분은 건반 위로 달빛이 촤르르 흘러내리며 구슬이 구르는 소리를 냈다. 이내 짙은 여운을 남기며 나지막하게 하나의 음을 내기 위해 연주자의 손이 건반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연주는 끝나지만 청중과 피아니스트의 감동은 멈추지 않아 고요함 속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피아노 뒤로 누군가 떠나버린 사람이 보고 싶어 애달픈 표정으로 먼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처연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세현은 채 5분도 되지 않아 끝나버린 녹턴 연주에 주체할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연주가 이어지면 좋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어서 형우를 바라봤다. 형우는 울음을 참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우 옆에 앉아 있는 민희와 찬이도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연신 훔쳐내고 있었다. 아! 녹턴 연주가 이렇게도 감동적이었다니. 세현은 자신의 충만한 느낌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는 형우와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연주자는 이어서 30분 동안 리스트 소나타 전체를 연주했다. 앙코르는 보통 짧고 가벼운 소품으로 채워지기 십상이지만 이례적으로 장대하고 무게감 있는 앙코르로 연주회가 마쳐졌다.
세현은 격양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대로 콘서트홀에 앉아 있고 싶었다. 하지만 형우가 아이들과 함께 일어나며 손짓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형우는 민희와 찬이를 먼저 집에 데려다주고 세현을 바래다 주기 위해 차를 몰았다.
“자기야! 오늘 너무 좋았어요. 특히 녹턴을 연주할 때는 황홀했어요.”
“응 나도 좋았어.”
“음악이 주는 위로는 정말 포근한 방주 같아요. 자기도 아이들도 오늘 너무 감동받던걸요?”
“으응. 녹턴은 나도 우리 아이들도 많이 좋아하는 곡이었지.”
“저도 너무 좋아하는데 그럼 나중에 우리 녹턴 가족 되는 거예요? 하하하”
“자기야! 사실 녹턴 No2는 애들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었어. 항상 연주할 때마다 앙코르 때 치던 곡이었기도 하고.”
“아......”
“애들 엄마는 명신 여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어. 대전에서 연주를 마치고 밤길을 운전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어."
"어머나...."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 운전사가 애들 엄마 차를 들이받아서 그 자리에서 그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그런데 그날도 애들 엄마는 앙코르 곡으로 녹턴을 연주했다고 들었어.”
"......"
세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언뜻언뜻 스치는 형우의 어두운 표정을 볼 때마다 홀로 지내는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또 두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는 무게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외로움과 양육의 무게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동안 나는 녹턴을 들을 수 없었어. 민희도 찬이도 엄마가 자주 연주해 주던 곡이었으니 머릿속에서 지워내려고 애를 썼을 테고. 아까 녹턴 연주가 시작되길래 깜짝 놀랐어. 조성진 님이 앙코르에서 녹턴을 연주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
“그랬군요.”
“녹턴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4년 동안이나 저 밑에 무거운 돌로 꾹 눌어두었던 민희랑 찬이 엄마 생각이 났어. 사무쳐있던 감정이 피아노 선율을 타고 올라오는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더라고. 가슴이 찢어져 내리듯 아리면서 숨이 멋을 것 같았어. 아마 아이들도 그랬을 거야. 오늘 밤 자기 전에 얘기를 나눠봐야겠어.”
“아....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분위기에 취해서 모두 감동받았다는 생각만 했어요.”
“미안해. 자기 앞에서 애들 엄마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자기의 과거도 송두리째 다 소유하고 싶어요.”
“정말이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이 생에서 나에게 더 이상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현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내가 정말 운 좋은 사내인가 봐.”
“에이~자기를 제가 먼저 좋아했잖아요. 죽자 사자 덤벼들던 저의 구애를 받아주셨으니까 은혜는 차차 갚을게요."
“일이 앞으로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럼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세희를 더 좋아하잖아."
"헤헤헤"
자동차가 까만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포근하게 느껴지자 세현은 이 세상에 형우와 단둘이만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녹턴 때문에 형우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형우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아 마음속으로 훈훈한 기운이 꽉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