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그때 그 사람

김경희

by 김경희


조금 전까지 앞이 안 보이게 퍼부어대던 장대비가 서서히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하늘엔 마치 물먹은 솜을 펼쳐 놓은 것처럼 축축한 구름이 무겁게 떠 있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접고 걷기 시작했다.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는 빗물에 말끔하게 세수한 탓인지 선명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기 머금은 도로 위로 여러 대의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차바퀴는 음식을 씹듯 쩝쩝거리는 소리를 냈다. 좁은 우수 구멍으로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꿀럭꿀럭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세현은 축축해진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저녁이 되어 어둑해지는 건지 하늘이 솜 이불을 덮고 있어서 침침해지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몇 시쯤 되었을까? 문득 궁금했지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가방 안에선 핸드폰이 소리 내어 울어대다 멈추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세현은 지친 몸으로 집에 도착해서 소파 위에 젖은 가방을 풀썩 내려놓았다. 가방 속에서 핸드폰이 짧게 울리다 멈추더니 다시 울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간 그녀는 비에 젖은 옷을 하나씩 천천히 벗었다. 물기있는 머리가 창호지처럼 흰 살에 닿으니 차가웠다.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 속에 가엾은 모습으로 세현이 서 있었다. 거울 속 세현을 바라보던 세현의 눈에서 눈물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샤워기에선 거센 비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해서 개운해진 그녀는 맘껏 울기까지 해서 후련했다. 세현의 장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울음 끝이 짧다는 것, 심각한 상황을 스스로 빨리 끝낼 줄 안다는 것, 힘든 일도 가볍게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다. 세현은 헐렁한 셔츠 위로 드라이 바람에 마른 머리카락이 스르르 떨어져 내리자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재중 전화 45통, 카톡창에도 빨간 숫자가 붙어있었다.



세현은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잘 익은 천도복숭아 서너 개를 꺼내 접시에 담고, 우유를 유리컵에 따랐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깨서 넣었다. "치이 차이"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하얗게 익은 계란 위에 소금하고 후추를 톡톡 뿌렸다. 식빵 두 쪽을 토스터에 구웠다.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 한 쪽에 계란 프라이를 얹고 치즈 한 장을 올린 다음 나머지 식빵으로 덮고 꾹 눌렀다.




무언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식탁에 차리다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세현은 점심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나자 천도복숭아를 얼른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형우가 떠올랐다. 천도복숭아는 형우가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세현은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 형우를 털어냈다. 달콤하고 새콤한 천도복숭아 즙이 입안 가득 퍼지자 양쪽 침샘에 쥐가 나는 듯 조이더니 맑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천도복숭아 하나를 먹은 다음, 입을 크게 벌리고 입안으로 샌드위치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계란 노른자가 ‘툭’ 터지더니 부드럽게 혀를 감쌌다. 쫀득한 치즈는 입천장에 철썩 달라붙었다. 혀를 요리조리 움직여 치즈를 식빵과 섞은 다음 우적우적 깨물었다. ”음~“ 소리를 내던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부드럽게 끄덕이다가 우유를 들이마셨다. 걸쭉하고 고소한 액체가 뒤섞이며 그녀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세현은 식탁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다 카톡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되니? 엄마한테 전화해 줘.’ 엄마한테 온 카톡이었다. ’세현아 제발 전화 좀 받아. 부탁이야.‘ 다급한 말투로 형우한테 온 카톡이 여러 개 있었다.



부재중 전화 숫자를 확인했다. 엄마 이름 옆에 숫자 5, 형우 이름 옆에 숫자 40이 빨간 글씨로 적혀있었다. 엄마에게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분명히 어느 집안에 몇 째이고, 키는 어쩌고, 직업은 이러저러한테 언제 시간 낼 거냐고 조르는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형우에게는 더더욱 답장도 전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 헝클어져 버린 머라카락처럼 아니, 단물 빠져 찐득해진 껌이 머라카락에 달라붙어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말아야 머리가 단정해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현은 싱크대로 그릇을 옮긴 후 천천히 씻었다. 접시를 닦으며 오늘은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휴대폰 전원을 끄진 않았다. 엄마에게도 형우에게도 그건 너무 가혹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마음도 형우의 마음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음식을 먹고 나니 하품이 나왔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양치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졸음이 순식간에 몰려와 재빨리 이를 닦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대로 스르르 깊은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설핏 잠이 들어가는데 식탁 위에 올려둔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벨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 하더니 다시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전화기는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세현은 몽롱한 상태로 몸을 일으켜 식탁 앞에 섰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핸드폰 화면에 떠있었다. '누가 다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핸드폰이 다시 울어대자 세현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여보세요."

"헬로!"


"누... 누구신가요?"

"세현 씨! 왕위 감독입니다. 통화가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드디어 연결됐군요."


"어머!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세현 씨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지난봄에 명동성당까지 세현이 길 안내를 해주었던 중국 감독이었다. 세현은 반가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순간 반가운 마음은 그렇다 쳐도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형우 대신 통화할 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현 씨, 내일 만날 수 있습니까? 저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내일 저 시간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저 지금 한국에 촬영하러 왔습니다. 세현 씨에게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감독님이 저한테 부탁을요?"


"하하하. 부탁도 부탁이지만 그때 헤어지고 나서 세현 씨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어머 그러세요? 저는 감독님 생각 전혀 못했는데요?"


"서운합니다. 저는 세현 씨 생각 많이 했습니다."

"아이고. 미안해요. 후훗"


"아니예요. 세현 씨는 그럴만하잖아요. 그때 사귄다는 분과는 잘 만나고 있습니까?"

"아...... 네......."


"어찌 대답이 명쾌하지 않은 걸 보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요. 별일 없어요."


세현은 감독에게 별일 없다는 말을 둘러대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감독은 잠시 더듬거리는 세현의 말투에서 무슨 낌새라도 챈 것처럼 그녀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듯 살가운 말투로 속삭였다.


"세현 씨! 내일 우리 만납시다. 명동성당에서 새벽 4시부터 촬영 허가를 받아서 한 씬만 찍으면 되니까 일 마치고 세현 씨와 시간 보낼 수 있어요. 꼭 부탁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내일 명동성당으로 갈게요. 감독님 촬영하는 것 구경하려면 일찍 서둘러서 가야겠네요."


"하하하 그렇다면 저야 좋습니다. 그럼 내일 만나요. 바이!"

"네 감독님! 내일 뵈어요."


세현은 오랫만에 왕위 감독과 영어로 통화를 하고 나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받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부탁을 하겠다는 걸까?' '내 생각을 계속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 걸까?' 세현은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지만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어지럽혀지면서 질서 없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만나면 궁금증이 해결되겠지.' 세현은 엄마 생각도 형우 생각도 하지 않고 내일 새벽에 나가기 위해 침대 위에 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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