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하다
그제부터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본격적인 장마철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우산을 쓴 작은 무리가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도로 위를 가로질러 나갔다. 그들은 우산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힘겹게 받아내고 있었지만 얄궂게 내리는 비에 온몸은 이미 다 젖어있었다. 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쏟아져 내리는 비를 처연히 맞으며 걷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장대비에 저리 맞서고 있는 걸까?
작은 무리에 끼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세현의 옷도 순식간에 젖어버렸다. 일부러 물에 흠뻑 적신 옷을 걸친 것처럼 옷소매는 징징대는 아이처럼 팔뚝에 철썩 달라붙었다. 바지의 가랑이는 종아리를 휘어 감고 귀신처럼 들러붙어 세현이 걸을 때마다 슬쩍슬쩍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의 와이퍼는 정신없이 양팔을 내저으며 유리창을 닦아내고 있었다.
“세현아! 세현아!”
애타게 불러대는 형우를 뒤로한 채 세현은 앞만 보고 내달렸다. 아무리 불러대도 돌아보지 않고 우산 쓴 무리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그녀를 형우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 수많은 물줄기가 거대한 벽이 되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형우가 목청껏 불러대는 세현의 이름은 물로 된 거대한 벽에 부딪혀 축축한 길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형우는 그저 쇠약해지고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어떤 생각이나 결심도 할 수 없이 대전투에서 궤멸된 사단의 패잔병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우산 든 사람들 틈에 끼어 사라져가는 세현의 뒷모습만 우두커니 바라봤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의 훈훈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세현은 오늘도 형우의 집으로 갔었다. 비 내리는 궂은 날씨라 하늘은 컴컴했지만 세현의 마음은 화창했다. 민희도 민희지만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듯한 찬이의 마음을 미세하게나마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니 찬이 혼자 있었다.
“찬! 잘 있었어?”
“......”
찬은 대답 대신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 시크한 표정 뒤에 감추어진 찬의 눈빛이 세현에게 아주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지난주에 민희를 위해 피아노를 치고 난 다음부터 찬은 세현을 슬쩍슬쩍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찬의 눈빛을 감지한 세현은 차갑게 얼어붙어 시베리아의 냉기 같던 찬의 마음이 봄 눈 녹듯 녹아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섣부른 기대감일지 모르지만 여자의 육감은, 특히 매사에 눈치 빠른 세현의 육감은 왠지 적중할 것 같았다.
“찬아! 민희랑 아빠는 어디 갔어? 아빠하고는 좀 전에 통화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잠깐 올라오라고 해서 방금 전에 68층에 올라갔어요.”
찬이가 만난 지 넉 달 만에 처음으로 문장으로 대답했다. 세현은 찬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외할아버님도 에너벨리에 사시니?”
“예”
“그럼 외할머님도 계시니?”
“예. 외할머니는 저희 집에 자주 내려와요.”
“그렇구나.....”
운명의 잘못이랄까. 세현은 아이들의 조부모가 에너벨리에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질투심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도무지 맞설 수 없는 거대한 우산이 형우와 민희 찬이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형우와의 결혼을 아니, 교제 자체를 거부하는 부모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우산 같았다.
어여쁘고 귀엽게 생긴 세현은 자신이 온갖 좋은 것, 값진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은 엄마의 기대감이 주입한 결과였겠지만 세현 역시 자신이 그 어떤 아리따운 신부들과 견주어도 부족함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형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한낮 허울 좋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직 소금이 되어 형우의 몸에 형체 없이 녹아들 수 있다면 세현은 기꺼이 소금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세현에게 찾아든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녀를 한없이 작고 하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려 형우를 높이 우러러보게 하는 마법을 부렸기 때문이리라.
“아빠!”
형우와 민희가 돌아오자 겸연쩍은 시간 속에 갇혀있던 찬이가 제 아빠를 크게 불렀다. 찬의 힘찬 부름에 놀란듯한 형우의 표정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민희는 맛있는 과자를 숨겨두고 몰래 꺼내 먹다 들킨 계집애의 표정으로 걸음을 멈칫거렸다.
“아빠. 할아버지가 뭐래?”
“으응. 별일 아니야.”
“그래? 나한테는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형우의 석연치 않은 대답에 찬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형우가 세현을 보며 말했다.
“자기야! 애들 할아버지가 조금 있다 내려오시겠대.”
“네?”
갑작스러운 소식에 세현이 깜짝 놀라자 찬이가 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아빠! 지금 쌤이 집에 와 있는데 내려오시겠대?”
“응. 어제 민희가 할머니한테 쌤 얘기를 해서 쌤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아셨어. 할아버지가 궁금하신가 봐. 쌤을 직접 보고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서 우리 먼저 내려온 거야.”
세현이 마음에 준비할 겨를도 없이 말쑥한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의 안내를 받으며 아이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들이닥쳤다. 할아버지가 세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소파 중앙에 앉자 점잖은 차림의 사내가 할아버지의 왼쪽으로 가서 섰다. 아이들의 할머니가 세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두 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올리자 할아버지는 티타늄으로 된 은색 안경 너머로 아이들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강아지들은 자리 좀 피해 주겠니? 할애비가 아빠랑 이 아가씨하고 할 말이 있구나. 송 비서! 아이들 좀 데리고 들어가 있게.”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 송 비서가 찬이와 민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서 앉지. 자네도 앉고.”
아이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잖으면서도 엄숙했다. 형우와 세현은 신입사원이라도 된 것처럼 경직된 자세로 엉덩이를 의자 끝에 살짝 걸치고 앉았다.
“그래, 아가씨 이름은 뭔가?”
“박세현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스물다섯입니다.”
음.....”
세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던 할아버지는 얼굴을 돌려 형우를 바라봤다.
“임 서방, 민희 말을 들으니 이 아가씨가 여길 드나든 지가 꽤 오래되었다고 하던데 자네 이 아가씨하고 어쩔 셈인가. 결혼이라도 할 셈인가?
“.......”
아이들 할아버지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형우는 장인어른의 질문에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세현은 형우의 태도가 답답했다. ‘이 여자는 저하고 결혼할 여자입니다’라거나 ‘우리 결혼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 애들은 어쩔 셈인가. 자네가 내 손주들하고 셋이서 살아가겠다고 해서 내가 이 집에서 살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 아가씨하고 결혼할 생각이라면 난 자네를 더 이상 자식으로 생각할 수 없네.”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위엄 있으면서도 삼숙 (森肅) 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임 서방!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 아이들이 한참 예민할 시기이니 문제를 지지부진하게 끌고 갈 생각은 하지 말게.”
“......”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아무 말 하지 않는 형우에게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답변을 듣고 싶어 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동안 세현에게 입을 꾹 닫고 말 없던 찬이처럼 굴었다. 사위를 지켜보던 장모가 딱한 생각이 들었는지 형우를 달래려는 척 몸을 형우 쪽으로 기울였다.
“아버님 말씀 너무 고깝게 듣지 말게. 아버지는 아직도 민주를 잊지 못해서 저러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우리가 오죽 애지중지하지 않았나.”
민희와 많이 닮은 듯한 할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받아들이겠네. 하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못할걸세. 아버지가 그건 용납할 수 없을 거야.”
“.......”
형우는 장모가 하는 말에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형우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형우의 장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자네 아직 이 아가씨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나 보군. 그렇담 내 잠시 얼마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 내 집으로 올라오게. 그렇다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게나. 어험!”
“그래, 임 서방! 아버지 성미 급한 줄 자네도 알지 않는가? 잘 생각해 보고 집으로 올라오게.”
“예.”
형우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겨우 외마디 대답을 하자 형우의 장인 장모는 송 비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거실엔 형우와 세현 둘만 있었지만 형우는 세현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런 형우를 바라보는 세현의 마음은 한 순간에 ‘툭’ 떨어지고야마는 붉은 동백꽃처럼 거실 바닥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지는 동백꽃은 대체로 슬퍼 보인다. 곱게 피어났을 때의 꿈같았던 환희의 순간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저 갈게요."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은 세현이 가방을 챙겨 들고 재빠르게 현관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가 금세 1층에 내려앉았다. 세현이 빠른 걸음으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자동 출입문이 스르륵 열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이 바닥에 무참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빗속으로 뛰어들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세현은 형우가 저만치서 다급하게 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비 내리는 거리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에너벨리라는 수렁에서 애써 도망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