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부부가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왔다. 교사 부부인 딸네는 남편과 같은 직업군이라 만나면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셋이서 직장에서의 애로사항과 개선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면 딸과 아빠, 장인과 사위의 만남이라기보다 선배 교사와 후배 교사가 모인 자리 같기도 하다.
아빠의 퇴직이 의미 있는 관문이라 생각했던 딸과 사위는 남편에게 "그동안 정말 애쓰셨어요."라며 존경과 위로의 토닥임을 흡족하게 퍼부었다. 내가 "그동안 수고했어요."라고 하는 말과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딸 부부의 애정 어린 에스코트를 받으며 맛집에 가서 냉면과 떡갈비를 우아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덕진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의 연못에는 연꽃이 앞다투어 봉긋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붉은 보랏빛을 띠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여름의 해 질 녘 분위기는 로맨틱한 감성을 자극한다. 마치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공원을 찾은 사람들 표정에서도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연지교를 따라 한옥으로 지어진 연화정 안으로 들어가니 연못 위에 있는 연화정이 마치 용왕님의 도서관 같았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옥의 고즈넉함 속에 잠시 머물면서 우리 넷은 유유자적한 기운을 가득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사위는 거실 의자에 앉았고 나와 딸은 과일을 챙기느라 주방에 들어섰다. 내가 냉장고에서 복숭아와 참외를 꺼내서 씻자 딸은 접시와 포크를 준비했다. 접시 꽂이에서 접시를 꺼내 들던 딸이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오마니! 요즘 바빴습메까?"
"아니? 왜?"
"그릇 정리가 안되어 있고 주방이 어수선합니다."
"푸흡~"
나는 웃음을 참으며 거실 쪽을 힐끔 쳐다본 뒤 딸내미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쉿! 아빠가 요즘 설거지를 하잖아. 근데 그릇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은 아직 안되나 봐."
"아이고."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던 딸이 참외를 깎고 있는 나에게 탐정가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마니! 혹시 이거 아빠의 전략 아닐까?"
"무슨 전략?"
"이게 말이야. 사람의 행동에는 의도가 숨어 있을 때가 있거든."
"숨은 의도?"
"응. 숨은 의도. 그러니까 아빠가 설거지를 이렇게 엄마 마음에 쏙 들지 않게 하는 데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겠냐고. 봐라 이렇게 맘에 안 드는데도 나한테 계속 설거지를 맡길래? 하는 의도 말이야."
"에이~ 설마."
"아니, 생각해 봐. 어떻게 접시와 공기와 컵을 한 곳에 뒤죽박죽 섞어놓을 수가 있어. 이건 다분히 의도가 있는 거라구."
"그러게. 네 말을 듣고 보니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치. 이건 아빠가 고도의 전략을 펴고 있는 거야."
"근데 아빠가 그렇게 고단수는 아니잖아. 설령 그렇다 해도 엄마는 그냥 계속 모른 채 할 거야. 너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지 보기나 하셔."
"내가 보기엔 아빠 승이야."
"왜?"
"엄마 같이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들은 각이 안 잡혀 있으면 견디기가 힘들거든. 그러니까 이런 꼴을 계속 참아내진 못할 거라는 말이야!"
"하"
주방에서 나눈 딸과의 대화는 둘 사이의 비밀로 붙여두었다. 과일을 먹고 한참이나 도란거리던 딸 부부가 돌아가고 과일 접시와 포크를 씻으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남편이 그릇 건조대에 서털구털 널어놓은 그릇들이 눈에 띄었다.
답답해도 당분간은 눈 딱 감고 못 본 척하려고 했는데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접시로 했다. 남편이 씻어놓은 접시를 접시 꽂이에 꽂았다. 밥공기는 밥공기끼리 나란히 포개 두고 국대접도 끼리끼리, 컵은 컵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줄 맞춰 앉혔다. 그제야 속이 개운해졌다. '내가 보기엔 아빠 승'이라고 하던 딸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