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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의 인생 우습지 않다

가을 이야기

by 김경희


어제까지 멀쩡하던 하늘이 아침부터 울었다. 가을비는 추적추적 내리니까 쓸쓸한 느낌이 드는데 올해의 가을비는 봄비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어제 티브이 뉴스에서 기자가 반 팔 티셔츠를 입고 단풍 구경 나온 사람들을 보면서 ‘이상한 가을 풍경’이라고 말했다. 가을 날씨가 가을답지 않게 포근하니 그랬겠지만, 나는 이상한 가을 풍경이 싫지 않았다. 새로운 느낌의 가을 풍경이랄까?


주말을 앞두고 생일 모임으로 서울에 있는 아들 집에서 모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는 아들 부부의 편의를 위해 전주에서 딸 부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여섯이 함께 어울려 생일파티를 하며 수많은 주제의 대화를 나누느라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잤다. 그런데 그이도 나도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이 든 우리는 일찍 일어났지만 휴일 아침의 느긋함 속에서 아들, 딸 내외가 늦게까지 자기를 바라며 그이와 나는 잠자리에서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을 도란거리던 그이가 문득, 오늘 9시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했다. ‘2023 JTBC 서울마라톤 대회’라면서 아마도 9시 반경에 3만 5천 명이 넘는 러너들이 천호대교 위를 지나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던 순간 러너들이 달리고 있는 천호대교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오슬로 시청사 앞에서 힘차게 달리던 노르웨이 인들을 보면서 느꼈던 역동적인 모습을 천호대교 위에서도 느껴보고 싶었다. 달릴 때마다 탄탄해지는 참가자들의 허벅지 근육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무는 얼굴 표정, 여러 명의 러너들이 박자에 맞춰 나풀거리는 리듬감을 내 눈에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그이와 나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까치발을 들고 거실을 지나 현관 밖으로 나왔다. 들고 나온 우산을 쓰고 한강 변으로 가는데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오후에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운동화가 젖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화 코 부분으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양말까지 금세 젖어버렸다. 요즘 날씨가 포근해서 천으로 된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왔더니 방수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짓가랑이도 벌써 젖어서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이미 젖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강 나들목을 지나 천호대교 쪽으로 걸었다. 멀리서 비를 맞고 뛰어가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마치 물결치는 파도처럼 보였다. 그이와 나는 물이 흥건해져서 질퍽거리는 운동화를 끌고 천호대교로 오르는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허벅지를 높이 들고 겅중겅중 뛰는 사람, 폭신한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사뿐사뿐 뛰는 사람, 몸을 질질 끌고 가듯 힘겹게 달리는 사람, 두 팔을 세차게 흔들며 뛰는 사람, 가슴을 내밀고 뛰는 사람, 땅을 바라보며 뛰어가는 사람, 시간을 체크하며 뛰는 사람, 입을 벌리고 볼을 털렁거리며 뛰어가는 사람,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며 뛰는 사람, 팔을 아래로 내리고 뛰는 사람, 보폭을 넓게 뛰는 사람, 옷을 잡아당기며 뛰고 있는 사람 등등. 비를 흠뻑 맞으며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뛰고 싶었다. 현장의 박진감에 이끌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내 옆에 서서 구경하던 남자가 뛰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갑자기 “아자아자 파이팅!”이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을 따라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러너들은 내가 외치는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속도로 달려나갔다. 그이가 흥분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달리고 또 달리는 사람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저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뛰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러너가 앞사람이 뛰니까 자신도 멈추지 않고 뛰는 것 같아 보였다. 먼저 간 사람이 내놓은 길을 자연스럽게 뒷사람이 따라가듯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앞사람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러너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인생도 어쩌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승점을 향해 온 힘과 마음을 집중시켜 달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춰야 할 자세 같았다. 우리의 뛰는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뛰어가서 만나야 하는 결승점은 모두 같은 곳이니 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야 편히 쉴 수 있는 것처럼 살아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은, 힘차게 뛰어가야 하는 동안은 곤고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결코 우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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