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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의 미학

책 완성을 위한 정보 4

by 김경희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붙여 써낸 글은, 때로 내 새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문장도, 저 문장도 내 마음을 담고 있어 어느 한 줄 빼내기 아깝다. 그러나 마음만으로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 문장을 사랑하는 일과 고치는 일은 다르다. 고치는 순간에는 냉정해야 한다. 애써 쓴 문장을 지울 때는 늘 아쉽지만, 글을 살리는 일은 결국 버림에서 시작된다.


평론가 황현산은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문장은 깎고 또 깎아서 단단한 조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단어 하나, 어미 하나를 덜어내고 바꾸는 과정을 통해 문장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가 말하는 단단함이란 화려함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걷어낸 무게 있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만이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짧고 절제되어 있지만, 흔들림이 없다. 그는 치열하게 퇴고를 반복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노인과 바다』를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수십 번, 심지어 백 번도 넘게 고쳤다고 한다. 그는 말은 덜어낼수록 강해지고, 문장은 비워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작가다.


요즘은 AI 맞춤법 검사기가 있어 몇 초 만에 문장을 고칠 수 있다. 한글 파일에는 맞춤법에 어긋나면 자동으로 붉은색 밑줄이 그어진다. 퇴고하기 참 편리한 시대다. 하지만 맞춤법을 바로잡는 것은 이제 기본일 뿐, 퇴고의 핵심은 문장을 다듬고 의미를 정리하는 데 있다. 문장을 다듬는 일은 곧 마음을 다듬는 일이다.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이 손끝을 통해 종이에 내려앉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안에 머물던 생각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까지는 반드시 퇴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쓴 문장은 거칠다. 마음이 급하면 문장은 헐떡이고, 감정이 격해지면 단어는 번뜩이며 튀어 오른다. 우리는 대개 쓰는 순간보다 다듬는 순간에야 문장의 표정을 읽게 된다.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를 고치며, 이 문장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그렇게 문장을 매만지는 손길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눈길이 된다.


퇴고는 단순히 틀린 맞춤법을 고치는 일이 아니다. 글의 호흡을 조율하고 의미를 정리하며,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처음에는 몰랐던 문장의 허점이나 표현의 과잉, 부족했던 장면이 퇴고의 시간 속에서 하나씩 드러난다. 그것은 글이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이자, 작가가 독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는 태도다.


가끔은 한 단어를 두고 오래 고민한다. 이 단어가 맞는 걸까? 이 문장은 너무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지 않을까? 그 순간, 나는 글쓰기가 ‘표현’인 동시에 ‘배려’라는 것을 깨닫는다.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내 마음을 정확히 옮기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타인의 언어로 읽히게 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쓴이는 독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쓴 글을 독자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까? 시간이 걸리지만, 내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소리 내어 읽기다. 이 방법은 여러 작가가 강조하기도 하는데, 문장의 리듬과 호흡을 확인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읽고 또 읽다 보면 문장이 점점 명료해지고 운율이 살아난다. 그렇게 다듬어진 문장은 독자에게 스르르 미끄러지듯 다가간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과정을 더한다.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녹음한다. 주변이 고요한 가운데 녹음하느라 문장에 집중하다 보면, 더 고쳐야 할 부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런 다음 녹음한 음성을 들으며 거슬리는 표현이나 어색한 문장을 고쳐 나간다.


퇴고의 시간은 이처럼 느리다. 느림 속에서 글쓴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시작을 다시 읽고, 중심을 짚으며, 결말을 묶는다. 처음 썼던 문장을 과감하게 지우거나 전혀 다른 문단으로 교체하기도 한다. 그것은 완벽을 향한 집착이 아니라, 내 글이 나를 닮되 타인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진심에서 비롯된다.


편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내가 쓴 글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읽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편집자와 만남은 축복이다. 편집자는 글을 ‘고친다’기보다 글의 진짜 얼굴을 찾아주는 사람이다. 덜어냄이 오히려 의미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한 문장이 책 전체의 흐름을 이끌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의 글은 타인의 눈을 통해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나는 이런 편집자를 곁에 두고 있다. 내 옆에서 함께 글 쓰고 있는 국어 교사 출신의 남편이다. 나도 남편의 글을 봐줄 때가 있지만, 주로 남편이 내 글을 먼저 읽고 고쳐준다. 그렇게 함께 고친 글이라도 출판사로 넘어가면, 다시 전문적인 수정과 편집이 이루어진다. 그때는 비로소 전문가의 손에 의해 글이 정성스럽게 매만져지는 시간이다. 이렇게 완성된 원고는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친다.


퇴고가 나처럼 이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퇴고를 쉽게 부탁할 수 없다. 유능한 편집자가 소속된 출판사를 만나는 일, 그것이 내 글을 가장 잘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쓴다는 건 자기 안의 진심을 꺼내는 일이지만, 편집과 퇴고는 그 진심을 가장 좋은 형태로 건네기 위한 성의 있는 표현이다. 투박하고 날것이던 글이 다듬어지며 누군가의 문이 되고, 마음이 되고, 때로는 위로가 된다. 그러니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듬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글은 쓰는 순간보다, 다시 읽는 순간에 완성된다. 이런 느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좋은 글을 쓰는 진짜 ‘작가’가 된다.






퇴고의 미학과 더불어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초고를 써서 오래 묵혀 두는 일이다. 나는 글 쓸 때 한 번에 휘몰아치듯 몰입하는 버릇이 있다. 글 쓰기 시작하면 하고 싶은 말이 우르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로 글을 붙잡으면 몇 주 만에 책 한 권 분량을 다 채워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글은 얼기설기 엮여 있어 어디에 내놓기도 민망하다.


한 호흡으로 쓴 글을 나는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묵혀둔다. 술을 빚을 때처럼 항아리 입구를 창호지로 봉하고 무거운 뚜껑을 덮어 두는 식이다. 술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글이 저절로 익는 것은 않지만, 오래 묵힌 글을 다시 꺼내 읽다 보면 초고를 쓰던 순간의 넘치는 감정, 한 뼘 모자란 표현, 엉성한 뼈대가 한눈에 드러난다. 결국, 글은 그대로 있는데 생각이 익어 간 것이다.


퇴고란 날것의 문장을 갈고닦아 기름칠하는 일이라면, 오래 묵혀둔 글을 고치는 일은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내가 쓴 글을 읽는 시간은 남몰래 달아주는 훈장과도 같다. 이렇게 글은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제 목소리를 얻고, 우리는 그 앞에서 늦게 핀 꽃 한 송이를 만난 듯 고개 숙여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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