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직장에서 종횡무진하던 시절, 부족함을 몰랐다. 열심히 일해도 지치지 않았고, 통장은 언제나 두둑했다. 남편 또한 성실하게 돈을 벌었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부’였다. 그땐 현금을 지갑에 두둑하게 넣고 다니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었는데, 내 지갑은 언제나 빵빵했다.
한 달 보험료로 지출하는 돈만 백만 원이 훌쩍 넘었고, 교회 헌금도 아낌없이 척척 받쳤다. 누군가 어려움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손부터 내밀었다. 사고 싶은 물건 있으면 망설임 없었다. 아들은 종종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 돈 쓰기 좋아하는 한국 아줌마야.”
지나간 40대의 초상화 속에서, 나는 매우 당당하면서도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남편의 생일이 다가왔다.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비상금으로 모아둔 200만 원이 생각난 것이다. 반듯하게 묶인 현금다발을 예쁜 봉투에 넣어 남편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남편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평생 돈 선물 받아본 적 없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괜히 뿌듯했다. ‘이게 진짜 사랑이지’ 하며 혼자 만족했다.
며칠 후 남편이 말했다.
“같이 좀 가자.”
그가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대신증권 효자지점이었다.
“당신이 준 돈, 의미 있게 써보자. 우리 둘 다 100만 원씩 투자해 보는 거 어때?”
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끄덕였다. 창구에 앉은 젊은 펀드매니저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때의 나는 숫자보다 그의 목소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좋아질 주식’이라는 이름의 종이에 사인했다. 그리고 통장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주식통장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때는 증권사에 직접 나가야 주식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던 때라 증권사에 나갈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넣어두면 은행 통장처럼 알아서 척척 이자가 불어날 줄 알았다. 3년쯤 지나 문득 확인해 보니, 통장은 깡통이 되어 있었다.
한때 200만 원이 담겨있던 종이는 아무 의미도 남지 않았다. 물건이라도 샀다면 추억이라도 남았을 텐데, 통 크게 선물한 돈이 거짓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로 우리는 결심했다.
“다시는 주식 같은 건 하지 말자. 주식하면 망한다.”
이런 믿음은 20년 넘게 이어졌다. 우리 부부에게 ‘주식’은 금지어였다. 뉴스에 주가가 오른다는 소식이 들려도, 고개를 저었다.
“저건 우리랑 상관없는 세상 이야기야.”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균열이 생긴다. 퇴직하고 연금으로 생활하기 시작하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이자는 줄고, 물가는 오르고, 매달 들어오는 연금은 적게 느껴졌다. 그때 다시 떠올랐다. 그날의 깡통 통장, 그 속에 묻힌 우리의 무지한 용기가.
책을 펼쳤다. 주식 책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건 단 하나, 이번에는 ‘배우기’로 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숫자만 보였다. 빨간불이 켜지면 기분 좋고, 파란불이 켜지면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감정이 차트와 함께 기분이 오르내렸다.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주식은 돈의 싸움이 아니라 심리의 싸움이라는 걸. 공부하지 않는 투자자는 운에 맡기고, 공부하는 투자자는 기다림에 맡긴다. 운 좋을 때는 ‘오늘은 잘 됐다’라고 하고, 손실이 나면 ‘오늘은 운 없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부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무수히 많은 강의를 들었다. 차트 읽는 법, 세력의 움직임, 시장의 흐름, 경제의 연결고리까지. 처음엔 낯설고 어려웠지만, 조금씩 이해가 쌓이자 마음이 달라졌다.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니 꿈에서도 주식 꿈을 꾸었다. 빨간불과 파란불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 감정의 색깔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탐욕으로 붉게 물들고, 어떤 날은 두려움으로 파랗게 식어 있었다.
주식의 움직임은 결국 투자자들의 마음에 이는 파도였다. 지금은 확신으로 기다린다. 시장이 흔들려도, 주가가 내려도, 예전처럼 허둥대지 않는다. 공부하고 나면 알게 된다. 돈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배운 마음은 절대 잃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얻은 진짜 이자였다.
돌이켜보면, 그날 남편에게 준 200만 원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움의 씨앗’이었고, 인생이 내게 던진 작은 도전장이었다. 비록 깡통이 되었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만약 그때 통장이 아니라 물건을 샀다면, 지금쯤 낡은 물건 한 점만 남았을 것이다. 통장이 깡통이 되었기에 깨달음을 얻었다. 돈은 흘러가도, 배움은 남는다.
요즘은 돈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돈은 벌면 쓸 수 있지만, 배우지 않으면 사라진다. 무식하면 용감하지만, 현명하면 기다릴 줄 안다. 주식이든 인생이든, 중요한 건 결국 기다릴 줄 아는 확신의 시간이다. 다음 장부터는, 왕초보들이 확신을 만들어가는 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주식 초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마음가짐,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게 된 ‘돈의 리듬’과 매매 방법에 대해서. 거창한 비법이 아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연필을 깎고 가방을 고르던 설렘처럼, 주식의 문턱 앞에서 갖추어야 할 준비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