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살아오며 깨달은 점이 있다. 돈의 많고 적음이 인생을 결정짓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돈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의 품격을 드러낸다. 나는 경제에 특별히 밝은 사람은 아니지만, 한 가지 오랜 세월 지켜온 원칙이 있다.
‘타인에게 돈 빌리지 않고, 빌려주지 않는다.’
이 단순한 문장은 인생의 울타리이자, 마음의 안전장치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있는 한도 내에서 쓰는 삶’을 지킨다는 건 쉬운 일 같지만, 막상 살다 보면 쉽지 않다. 누구나 조금 더 나은 집, 더 멋진 차, 더 큰 수익을 꿈꾸며 초과 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빚지지 않고 살려고 애써왔다. 이유는 여고 시절 들었던 두 개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보증 서지 마라.”
“돈 빌려 쓰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마라.”
이 말은 친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교회의 초대 장로였던 할아버지는 교인의 부탁으로 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 잃고, 남루한 방 한 칸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분의 인생은 빚이라는 단어가 가진 잔혹한 이면을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이후 우리 집안의 철칙이 되었고, 친정아버지의 삶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애초에 돈으로 관계를 엮지 마라.”
이 말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 내려온 생존의 지혜였다. 그래서일까. 우리 형제자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서로에게 돈 빌려달라 말한 적 없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면, 말 대신 슬그머니 뒷주머니에 얼마만큼을 찔러주는 게 전부였다. 그 돈은 ‘빌려주는 돈’이 아니라 ‘마음의 돈’이었다.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작은 손길,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돕는 방식이었다.
남편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때 절친했던 친구가 급한 사정으로 돈을 빌려달라 했고, 남편은 망설임 끝에 융자까지 받아 빌려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감사 인사 대신 냉랭한 거리감이었다. 돈이 오간 뒤로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우정은 금이 갔다. 남편은 돈 잃고 친구까지 잃게 되었다. 그 일을 겪은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다시는 친구든 누구든, 돈거래 하지 말자.”
이 약속은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의 조용한 약속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돈 빌려달라는 말을 듣는 건 결코 쉬운 일 아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빌려줄 수 없는 현실이 부딪힐 때 생기는 미안한 마음은 참 묘하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부탁을 할까’ 상대방의 입장에 서면 어떻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해서 도와주면 결국 나도 함께 무너진다. 금고에 현금다발 가득 쌓아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한정된 금액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삶의 지혜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다. 요즘 주식을 배우며, ‘빚지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투자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주변에서 빚을 내 투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누군가는 “빚 갚기 위해 투자한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화약고에 불 들고 뛰어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투자는 결국 마음의 싸움이다. 욕심이 커질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빚이 있다면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판단은 흐려진다. 잃어도 삶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돈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오르내림에 흔들리지 않는다. 투자의 본질은 돈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다스리는 일이다.
돈에 쫓기지 않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투자가 가능하다. 빚을 청산해야 시장의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빚 지지 않는다는 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마음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지지 않는 삶의 태도다. 누군가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마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살아내겠다는 다짐.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은 자유롭고 여유로워진다.
나는 여전히 큰 부자가 아니다. 하지만 빚 없이 사는 마음의 평안만큼은 누구보다 부자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부는 숫자로 셀 수 있지만, 마음의 부는 고요함으로 느낄 수 있다. 오늘도 스스로 다짐한다.
‘빚지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게 살자.’
이런 다짐이 매일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근심을 잠재우며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불안한 시장의 소식에도, 누군가의 수익 자랑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남보다 늦더라도, 조금 덜 벌더라도 괜찮다. 내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니까.
돈은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그것에 매이지 않을 때 진짜 자유가 찾아온다. 욕심이 사라질수록 삶은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이제는 안다. 진짜 부는 통장에 쌓이는 숫자가 아니라, 잠들기 전 불안 없이 눈 감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주식 투자할 때는 마음 편할 만큼 적은 자산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누구에게는 10만 원이 될 수도 있고, 50만 원, 100만 원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돈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다. 적은 돈으로 시작하면 배우는 것은 크고, 잃는 것은 적다. 욕심부리지 않고 한 걸음씩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숫자가 아닌 마음의 균형이 먼저 자리 잡는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진짜 투자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