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길이었지만 다행히 찾는데 애를 먹진 않았다. 그런데 주변에 카페라고는 없다. 건물 비슷한 것도 없다. 속은 것인가 싶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서울에 이런 넓은 호수를 안은 숲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안 것이 억울할 만큼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는 아름다웠다.
홀리듯 호수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숲 앞이다.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나타났다. 아니, 이걸 길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길게 난 작은 통로. 오솔길이라 하기에도 너무 좁고, 그렇다고 길이 아니라고 하기엔 분명히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마치 이곳으로 어서 들어서라는 듯. 나무와 이름 모를 풀 사이로 난 길이 신비한 카페로 가는 비밀 통로 같기도 했다. 민서는 용기 내어 그 길로 들어섰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적막함이 밀려오고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흙길, 군데군데 덜 녹은 눈 위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며 눈과 함께 뽀득댔다. 그 소리가 적막을 깨고 그녀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뒤돌아보니 그녀가 들어왔던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녀가 살아온 잊고 싶은 지난날을 함께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감추어진 길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눈앞에 스무 평 남짓한 정원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아직 다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걸었는데 초록빛이 생생한 정원이라니. 그 정원의 끝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품은 작은 집이 하나 나타났다. 놀라움보다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깃들었다. 바로 이곳이 오늘 민서의 최종 목적지임에 틀림없다.
정원에는 네 귀퉁이가 둥글게 디자인된 작은 원목 간판이 하나 있었다. <세상에 없는 카페> 카페 이름이 그녀는 왠지 낯설지 않았다. 초대장부터가 이미 심상치 않았으니까.
민서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아늑하고 따뜻했다. 한쪽 벽 대형 책장을 가득 메운 책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무 향과 적절히 섞인 종이 냄새가 기분 좋게 그녀를 감쌌다.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어서 오세요, 민서 씨. 생각보다 빨리 찾으신 듯한데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카페 주인 지운이 어느새 민서 앞에 서서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저를 아세요? 제 이름을 어떻게..." "바람이 알려주던 걸요." 지운이 미소를 띠며 눈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까는 분명 닫혀 있던 것 같았는데 민서의 착각이었을까,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살랑이는 바람에 커튼이 사락사락 수줍은 몸짓을 했다. 민서는 홀린 듯 창가 쪽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지운이 따뜻하게 웃으며 메뉴를 보여 주었다. <라벤더 아몬드 꿈 차>
민서가 메뉴판 앞뒤를 살펴보다 물었다.
"종류가 달랑 하나인가요?"
지운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아, 죄송해요. 달랑이란 말은 취소할게요."
"괜찮아요, 이곳에서는 각 손님들에게 맞춤형 메뉴를 제공합니다. 민서 씨를 위한 이 메뉴는 라벤더와 아몬드 우유가 들어간 따뜻한 차예요. 스트레스 완화와 편안한 수면을 도와준답니다."
"맞춤형요? 그럼 가격도 비싸겠네요. 여기 금액 표시가 안되어 있어서..."
정규 직장 없이 항상 가볍기만 했던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며 민서가 물었다.
"네, 비싸답니다, 아주 많이."
이렇게 대답하며 난감해하는 민서를 보고 지운이 덧붙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이야기는 밖으로 꺼내기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지요. 당신의 메뉴는 그 용기 값으로 지불됩니다.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 그리고 아픈 기억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민서는 다소 황당한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하다 고민에 빠졌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급할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주세요, 제 라벤더 아몬드 꿈 차."
돌아서는 지운의 팔에 살짝 손을 갖다 대며 민서가 말했다.
"후회 없는 결정일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지운은 카페 안 저쪽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민서는 잠시 그녀가 사라진, 카페 안의 또 다른 문을 응시하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책장에 도서관처럼 잘 정리된 책들을 보고 있자니 민서의 마음도 조금 정돈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지운이 반짝이는 은색 쟁반을 들고 나왔다. 소중한 무언가를 옮기듯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민서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자신을 위해 쏟는 정성인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이건 서비스랍니다."
지운이 쟁반을 내려놓으며 찻잔 옆을 가리켰다.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작은 접시 위에 제멋대로 찌그러진 탁구공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잎이 퉁퉁 불어 뚱뚱해진 꽃 같기도 한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이게 뭔가요?"
"다크 초콜릿 디저트입니다. 체리 초코 블리스라고 불러요. 체리의 비타민과 미네랄 성분이 불안감을 줄여 주고, 초콜릿은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세로토닌을 증가시켜 주지요."
"블리스요?"
"블리스는 더없는 행복을 뜻해요. 작은 디저트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는 완벽한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지요."
지운이 디저트 접시를 민서 앞으로 바짝 밀어 놓으며 말했다. 금테를 두른 세련된 접시 위 검붉고 못생긴 그것을 보니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민서는 아주 천천히 스푼을 들어 엄지손톱만큼 떠서 입에 넣었다. 내키지 않아 하는 민서의 얼굴을 지운은 내내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결국은 다 마음에 들어 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미소를 머금고.
못 이기는 척 디저트 반 스푼을 떠 넣자 민서의 뚜렷했던 미간 주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와, 이거 보기보다 훨씬 맛있는데요."
민서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겉모습은 첫인상과 같아서 겪어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어요. 진정한 가치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시간과 그 시간에 들인 정성이랍니다."
가끔은 도를 넘기도 하는 엄마의 집요하고 끈질긴 관심을 떠나 다른 누군가의 정성으로 빚어진 시간, 그것이 주는 달콤 쌉싸름한 선물에 민서는 정말 오랜만에 행복을 느껴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카페에 들어온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니.
"그 디저트와 이 차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지운이 함께 가져온 차를 민서에게 권했다. 민서는 쌉싸름한 디저트를 한 입 더 떠 넣고 찻잔을 들었다. 아몬드의 고소함과 향긋한 라벤더가 어우러져 은근히 고급스러운 향을 자아냈다. 먹기 딱 좋게 식은 따뜻한 차가 구르듯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연이어 한 모금 더 마셔 보았다. 약간의 쓴맛을 아몬드 우유가 잘 잡아주었고, 어딘가 숨은 민트 향이 살짝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깊은 향 덕에 마치 꽃밭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우유 덕분인지 목 넘김도 훨씬 부드러워요."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오늘 밤엔 숙면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민서는 자신의 맞춤형 차를 한 모금 더 깊게 들이켰다. 고소함을 담은 포근한 꽃 향기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민서는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