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한 번쯤 머피의 법칙에 완벽히 지배되는 날이 있다. 하필 오늘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이 있는 날, 민서에겐 오늘이 그랬다. 며칠 전부터 예보된 주말 봄비 소식이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구름은 많아도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면 지하철 역까지 금방이고 지하철에서 내려 카페까지도 500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갈아타는 번거로움에 우산을 지니는 수고까지 더하고 싶지 않아 민서는 그냥 집을 나섰다.
"어짜피 들고가는 가방인데 그 안에 우산 하나 챙겨 넣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현관을 박차고 나가는 민서의 가방에 기어코 우산을 욱여넣고야 마는 오빠는 이제 없다.
한 두 방울씩 빗물이 스치듯 버스 창문을 긋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위로 제법 세차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에 내려앉은 비는 처음엔 작은 물방울이었지만 점점더 많은 물방울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마침내 누가 수도라도 틀어 놓은 듯 한 데 모여 세차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선명하던 창 밖 풍경이 흐릿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민서의 머리 속도 흐릿해졌다.
'이제 다음에 내려야 하는데...'
버스에서 내려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뛰었다. 익숙한 듯 민서는 물 웅덩이를 요리조리 잘 피해서 뛰었지만 여학생 하나가 바로 그녀 옆을 스쳐 지나며 웅덩이를 제대로 밟는 바람에 종아리까지 시커먼 물이 튀었다. 뭐라 불만을 털어놓을 여유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다시 뛰기 바빴다.
'소나기네. 역에 내리면 그쳐있을 거야.'
전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보니 우산을 쓴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민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 비쯤은. 종종걸음으로 100여 미터쯤 걸어가자 거의 멈추었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굵직한 빗줄기가 바람을 타고 여과 없이 민서의 얼굴을 강타했다. 큰일이다. 아직 반도 못갔는데... 물에 젖은 곱슬머리 자신의 모습을 민서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따라 왜 머리도 묶지 않은 채 나왔는지... 채용 공고에서 보았던 '용모단정'이란 네 글자가 생각났다. 부랴부랴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가방과 주머니를 뒤졌다. 평소엔 여기저기서 숨어있던 머리끈이 하나씩 잘도 나오더니 오늘따라 구석구석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머리끈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점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운 좋게 어딘가에 남아있을 지도 모를 머리끈 재고에 관해 물었다.
"어제 재고가 똑 떨어져서 주문 넣었는데 이따 오후에나 들어올 거예요."
면접 시간에 늦을 수는 없어 일단 나와 다시 뛰었다. 젠장. 머리끈 보다 우산을 구입하는 것이 먼저 아니었을까? 아, 어쩜. 이렇게 모든 게 약속이라도 하듯 착착 들어맞지 않기도 쉽지 않을텐데... 명백히 머피의 법칙이 지배하는 하루를 시작한 그녀와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는 과연 누가 더 운이 없는 것일지... 뜬금없이 민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 안에는 젊은 남자 한 명과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보기로 했는데요."
"아, 네. 잠시만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상당히 용모단정한 그녀가 작업대 뒤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사라졌다 금방 다시 나왔다. 사장으로 보이는 50대 초반의 남자가 큰 덩치와 맞지 않는 날쎈 동작으로 좁은 문을 통과해 성큼성큼 민서에게 다가왔다. 민서의 용모 파악을 위해 재빨리 아래 위로 그녀를 훑었던 것도 같다.
"우산이 없었나 보네. 카페는 용모가 단정해야 하는데... 일단 이쪽으로 들어올래요?"
그 놈의 용모, 용모. 하필 오늘 비가 와서, 우산을 가져나오지 않아서, 하필 곱슬머리여서, 오늘따라 머리끈이 없어서... 두서없는 핑계로 부해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내리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막 일어서 나가려는 손님과 부딪혔다. 그 바람에 손님이 반납 중이던 쟁반 위에서 컵이 쓰러졌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컵에 남아있던 커피가 쏟아지며 손님의 흰 셔츠에 짙은 갈색의 오점을 남겼다. 무려 몇 개씩이나.
'망했다.'
손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되뇌이며 민서는 생각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