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희영의 말벗을 해 주고도 길디긴 작별인사를 나눈 후 민서는 희영의 병실을 나섰다. 병원 복도를 걸으며 아까 희영의 아들을 만났던 순간을 생각했다. 다른 신생아들과 비교해 보니, 완전 장군감이라던 희영의 남편 말처럼 아기는 모든 것이 다 큼직했다. 눈, 코, 입, 그리고 얼굴도. 물론 그 기개도 남달라 보였다. 희영의 마음도 그만큼 든든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20대 중반 조금 넘겼는데 벌써 무슨 출산이냐며 전혀 부러울 것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민서는 순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굳이 운전을 해서 온 것이 병원에 올 때에는 잘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빈손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후회가 되었다. 양손만 빈 것이 아니라 마음도 텅 빈 것 같아 민서는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갑자기 피곤하네. 엄마 말 들을 걸, 운전 어떻게 하지?"
"지하 1층에 카페가 있어요. 거기 커피가 아주 향기롭고 정신도 맑게 해 준답니다."
속으로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녀 자신도 모르게 한탄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다. 한 간호사가 민서 옆을 지나다 귀띔하듯 알려 주었다. 참 상냥한 목소리였다.
생각해 보니 민서는 오늘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운전하기 전에 카페인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기도 하여 간호사가 알려준 대로 지하 카페를 찾았다. 막상 가 보니 카페라기보다는 백화점 푸드 코트 같은 느낌의 장소였다. 입구에서부터 짙은 커피 향이 노곤함을 달래줄 편안한고 아늑한 카페를 상상했던 민서는 적잖이 실망했다. 넓은 지하 공간에 입점한 가게들은 서로 간의 제대로 된 구분도 없이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과 일반인들로 뒤섞여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스러움의 끝 어딘가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많이 맡아보았던 오래 끓인 계란국, 밍밍한 김치찌개 냄새에 눌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공짜로 만끽할 수 있는 진하고 고소한 커피 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 깊은 향이 동동 뜨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여주곤 했는데 글렀다.
'주차 문제만 아니었어도 이 카페로 오진 않는 건데... 그냥 갈까?'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홀린 듯 카페 앞에 와 있음을 알았다.
'이왕 왔으니 그냥 주문하자. 커피값도 싸네.'
민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가방이 없음을 깨달았다.
'맞다, 아까 주차하고 희영이 줄 선물만 들고 나왔구나. 여기 커피를 맛볼 운명은 아닌가 보네.'
민서가 미련 없이, 하지만 주문을 취소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충분히 전하며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말을 건네었다.
"주문 취소하셨으면 이거 하나 드실래요?"
민서와는 달리 어깨까지 오는 차분한 생머리의 단정한 여성이 방금 카페 직원에게서 받아 든 커피를 양손에 들고 말했다.
"아니에요, 처음 뵙는 분인데 그건 민폐죠. 괜찮습니다."
민서는 공손히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아메리카노 2잔 무료 쿠폰을 받았는데 어차피 한 잔씩 나눠 쓰진 못한다 해서 그냥 두 잔 주문했거든요. 제가 이 시간에 커피를 두 잔씩 마시는 사람은 아니라..."
"그럼 커피 한 잔 신세 지겠습니다. 언제 갚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말끝을 흐리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그녀에게 또다시 거절을 하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민서도 웃으며 답했다.
"살다 보면 언젠가 또 갚을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카페 앞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무심하게 건네는 그녀의 행동에 민서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민서는 가볍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른 음식 냄새 때문에 미처 맡지 못했던 커피 향이 코와 입으로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다. 그 진한 맛이 쓴맛과 고소함을 적절히 머금고 입안에 남아 민서는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까는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컵으로 시선을 돌려 인쇄된 카페 이름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 그 간호사의 말대로 아주 향기로운 커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친구들은 이미 정규직이거나, 가정을 이루었거나, 출산을 했거나, 그도 아니면 힘든 고시를 준비하고 있어 같은 백수여도 엄밀히 말해 같은 레벨로 여겨지지 않거나...
집으로 가는 길, 이런 생각이 다시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엄마의 말대로 돌아가는 길은 차가 훨씬 많아져 복잡했고, 중간에 사고 처리 구간이 있어 시간도 훨씬 오래 걸렸다.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빠르게 작용하는 카페인 덕분인지 머릿속까지 나른해지진 않았다. 남아있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민서는 병원 카페에서 만난 고마운 그녀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어쩌면 민서와는 다른 그녀의 단정한 생머리를 떠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