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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너울 Aug 15. 2024

[제6화] 비로소 떡볶이

단골 떡볶이집;신비한 초대장

 집으로 돌아온 민서는 주차를 하고 단골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친구와 있으면서 이 시간까지 아직 저녁도 안 먹었냐로 시작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서이기도 하지만 지친 하루 끝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도 해서이다.

'오늘따라 더 멀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생각이 많았던 오늘은 모든 게 더디게 가는 것 같다. 이제 저기 보이는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 떡볶이집이 언제나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좁은 골목길 중간쯤에 자리한 20년이 넘은 이 집은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닫이문의 손잡이에는 손때가 가득했고, 열 때마다 뭔가에 걸려 꼭 한 번은 쉬어 가야 했다. 오래된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고, 의자를 움직일 때마다 끌린 자국이 명백한 바닥은 남루했다. 단 하나, 글자가 희미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 얼마 전에 바꾼 새 간판만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모던함을 갖추고 있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이지만 떡볶이집에 어린 추억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어서 민서는 새 간판에 영 정이 들지 않았다. 그곳만의 익숙한 따뜻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이 어쩌면 그녀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해서 민서는 조금 더 쓸쓸해졌다.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려 민서가 서둘러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한 여성이 마침 떡볶이집을 나오고 있었다. 민서는 그녀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옆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민서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빨간 스웨터의 송송 솟은 털이 간판의 조명 아래 빛나며 한 올 한 올 더욱 부드럽게 살아났다. 그 보드라움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민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매콤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주인아주머니의 20년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긴 고추장 양념의 깊은 풍미가 냄새로도 느껴졌다. 민서는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는 언젠가부터 창가 대신 안쪽 계산대 근처에 앉는다. 벽에는 그곳을 다녀간 손님들 수만큼이나 그들이 남기고 간 메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추억 사이 어딘가 민서와 민석의 지난 기억도 분명 있을 터인데...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민서가 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지 않아도 그 기억을 다시 꺼내 볼 수 없으니 편했다.

  "오랜만에 왔네, 민서 학생."

그녀가 이 떡볶이집을 처음 왔던 때부터 지금까지 주인아주머니는 민서를 학생이라고 불렀다. 옆 테이블 손님들이 쳐다보는 것이 민망해져 민서는 괜히 더 큰 소리로 난감한 마음을 전했다.

"또 학생이라고 하시네.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제가 학생이에요?"

"한 번 학생은 영원한 학생이지. 그래도 나름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니까."

맞는 말이다. 실제로 주인아주머니에게는 노랑머리 학생도 있고, 눈꼬리가 처진 순둥이 학생도 있고, 어깨가 운동장인 학생도 있고, 유난히 이곳에서 눈물이 많다는 수도꼭지 학생도 있다. 그리고 곱슬머리 남매 학생도 있었다. 민서는 주인아주머니 나름의 노하우로 탄생한 별명이 자신처럼 실제 이름으로 바뀐 학생이 또 있을지 가끔 궁금했지만 아주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이곳의 떡볶이는 원래 한 종류로 맵기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집에서 민서의 별명이 새롭게 바뀌던 날 그녀에게만 따로 생긴 메뉴가 있다. 주인아주머니가 그날 말없이 민서에게 가져다준 떡볶이. 송송 썬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한 스푼 더 추가한 매운맛. 입안을 괴롭히는 강렬한 맛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이 고였다. 매워서 우는 것인지, 슬퍼서 우는 것인지 민서는 그날 떡볶이를 먹으며 한참을 울었었다.

"저 오늘 그 매운맛 떡볶이로 주문해도 되죠?"

"왜? 오늘도 실컷 울게?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 좀 답답해서 매운 것 먹고 속 좀 풀고 싶어서요."

"뭐든 풀고 싶을 때 그만한 것도 없지. 금방 가져다줄게."  

떡볶이에 들어간 채소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주인아주머니는 양배추와 대파를 큼직하게 더 썰어 넣었다. 대파 한 조각과 쫄깃한 떡을 함께 찍어 매콤한 소스에 한 번 더 푹 담갔다 한입에 쏙 넣으면 그 진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주인아주머니의 오랜 노하우가 집약된 양념장의 깊은 맛이, 매운맛을 넘어 입안 곳곳에 은은하게 감도는 단맛과 조화를 이루며 오늘도 민서에게 작은 행복을 선사했다. 민석과 함께 먹을 땐 더 맛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혼자 먹어도  꽤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먹는 단골집 떡볶이는 하루의 노곤함을 잊고, 다시 시작될 힘든 내일을 위로하기에 딱 적당한 맛이었다.

 이 떡볶이 집은 민석에 의해 끌려오다시피 하여 처음 알게 된 곳이다. 그때도 이집은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안고 있는 허름한 곳이었는데 물론 그때는 이런 현대식 간판도 아니었다. 길었던 해가 지고 난 한참 후에도 비춰주는 조명 따위 없는, 조금은 빛이 바랜 간판을 보고 왜 이런 곳을 데려오냐며 민석에게 핀잔을 주었던 그녀였다.

"글쎄 오빠 믿고 한 번 가보자니까. 우리 어렸을 때 자주 갔던 학교 앞 그 분식집 떡볶이 맛이 난다니까. 너 그 집 떡볶이 진짜 좋아했잖아."

"오빠 너나 먹어. 난 내 친구들이랑 갈 거라고."

떡볶이를 좋아하는 민서가 줄 서서 먹는다는 유명한 떡볶이를 먹고 와서는 요즘 떡볶이는 예전의 그 맛이 나질 않는다고 지나가는 투로 했던 말을 민석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한때는 오빠의 그런 세심함이 지겹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기도 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말, 민서에게 오빠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두 살 터울의 민석의 덕분인지, 민석의 탓인지 그들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남매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빠가 잘 챙겨주고 자상하다고 커서 오빠랑 결혼한다고 할 땐 언제고, 요즘은 왜 그렇게 오빠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한 오빠에게 대차게 큰 소리를 쳤던 어느 날, 평소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 아빠마저 보다 못해 오빠 편에 섰다.

"아니, 그건 애기 때 멋모르고 한 소리고!"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중2의 기세로 집안 대장 노릇을 하던 그녀에게도 민석은 한 열 살쯤 많은 오빠처럼 행동했었다. 이제 와 몇 번의 이불 킥으로, 실컷 열을 내다 아무렇지 않게 잊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되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편하게 이불 킥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떡볶이 한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아참, 이걸 전해주라던데..."

민서가 떡볶이를 다 먹고 나자 주인아주머니가 빨간 리본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누가요? 이게 뭔데요?"

"안 열어 봤으니 나도 모르지. 아까 학생 들어올 때 막 나가던 여자가 전해 주라고 했어."

"그 빨간 스웨터 입은 사람이요?"

"맞다, 그랬지. 다홍빛 털 스웨터를 입고 있었어. 아는 사람 아냐? 이름도 알고 있던데..."

말을 마친 주인아주머니가 눈짓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실제로 봉투 뒤에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송. 민. 서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모르는 사람이 준 봉투. 당황한 것도 잠시 민서는 궁금증에 못 이겨 서둘러 봉투를 열어 보았다.

<조금 특별한 카페에 민서 님을 초대합니다. 당신의 삶에도 있을 작은 기적을 경험하시겠습니까? 초대장을 받으시려면 YES를 터치해 주세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신종 사기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민서는 YES라는 글자를 찾기 시작했다. 초대장 안팎을 아무리 살펴봐도 간단한 초대 메시지, 달랑 세 문장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면서도 민서는 대수롭지 않게 빨간 리본 봉투를 가방 안에 대충 밀어 넣고, 민석과 그녀의 추억이 깃든 떡볶이집을 나왔다. 민석 대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중한 공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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