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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20. 2021

웃음이 당신을 배반하기 전에

'아내의 맛'에 출연한 두 정치인의 일상을 마냥 즐길 수 없는 이유

“이런 진부하고 노회한 방식으로 서울시장을 하겠다는 건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지난 13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은 작심한 듯 비판의 수위를 낮추지 않았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역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선 김진애 의원이 두 사람을 향해 날을 세운 건 바로 지난 5일과 12일에 각각 방송된 TV조선 <아내의 맛> 130회와 131회에 연이어 출연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 11일에 출연한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새아침>에서 <아내의 맛>을 비판했다. 다만 나경원 전 의원과 박영선 장관에게 날을 세운 김진애 의원과 달리 우상호 의원은 “TV조선이 공정성을 잃었다”며 방송사를 향한 비판을 던지는데 힘을 싣는 인상이었다.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아직 경선이 끝나지 않은 두 당의 특정 후보를 조명해준 건 명백히 선거에 개입한 것”이며 “이런 기획을 해서 요청하고 제안한 방송국이 문제”라는 것이 우상호 의원의 주장이었다.


두 의원의 말처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나경원 전 의원과 출마 선언이 예상되는 박영선 장관이 <아내의 맛>에 출연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선거법 위반 여부까지 따져 묻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예민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이번 서울시장 선거가 보궐선거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방송 출연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선거방송심의에 관한 특별규정에 따르면 선거일 전 90일부터 후보자의 방송 출연은 제한된다. 하지만 재보선 같은 경우에는 선거일 60일 전부터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꾸려지는 탓에 선거 93일 전에 출연한 나경원 전 의원과 86일 전에 출연한 박영선 장관은 합법적인 출연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처음은 아니다. 일찍이 2018년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아내의 맛>에 출연해 요리 솜씨를 뽐낸 바 있었고, 이재명 경기도지사 역시 같은 해에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에 출연하며 대중 앞에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다. 보다 과거로 돌아가면 작정하고 정치인을 섭외해 짓궂게 게임을 시키고 토크를 이어나가는 예능 프로그램이 기획되기도 했다. 2013년에 방영한 JTBC <적과의 동침>이 그것인데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나란히 앉아 만담 같은 대담을 주고받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18대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씨와 문재인 대통령은 나란히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상 예능으로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이렇듯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처음은 아니지만 선거를 앞둔 기간에 유력 인사의 출연을 제안하고, 결정한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각종 여론 조사에서 여당과 야당 경선 후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지지율을 얻고 있다고 평가되는 두 사람에게 출연을 제안한 것 자체가 노림수가 상당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실제로 나경원 전 의원이 나간 5일 방송은 11.2%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프로그램 자체 최고 시청률을 돌파했다. 박영선 장관이 출연한 12일 방송은 상대적으로 낮은 9.6%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률 대결 구도에서는 나경원 전 의원에게 밀리는 듯한 인상이었지만 프로그램의 지난 회차와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TV조선은 화제성을 잡는데 확실히 성공한 인상이다.


방송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가 확연히 달라 보인다는 점 역시 흥미로웠다. 나경원 전 의원은 자상한 엄마이자 아내로서 화목하고 소박한 가족의 일상을 민낯처럼 드러내는데 치중하며 온전히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 박영선 장관은 주말에도 공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노출하며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성격을 겸비하는 방향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각각 방송을 통해 쇄신하고자 하는 이미지 혹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던 셈이다.


자식들과 관련한 비리 의혹이 많았던 나경원 전 의원은 딸과 함께 소탈한 일상을 보내는 엄마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권위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덜어내고 보다 대중적으로 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쇄신하겠다는 전략이 엿보인다. 반대로 박영선 장관은 행정 업무에 만전을 기하는 현직 장관의 분주한 일정을 보여주면서도 다정다감한 남편과의 동행 외에 사생활 노출을 최소화하며 불필요한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겠다는 인상이 강하다. 나경원 전 의원이 춤을 권하는 패널들의 제안에 함께 몸을 흔든 것과 달리 박영선 장관은 춤보다는 노래가 낫다며 ‘아침 이슬’을 부른 것도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우상호 의원과 김진애 의원이 볼멘소리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두 의원만이 나경원 전 의원과 박영선 장관의 방송 출연을 두고 뾰족해진 심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법이라 규정할 수 없을 뿐 선거운동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재보선 선거는 선거운동 기간이 짧다. 그만큼 일찍이 유력 후보로 인식된 이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용이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지율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는 후보가 경선을 앞두고 방송에 출연하는 유력 후보의 행보를 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 후보 단일화를 발표한 김진애 의원과 우상호 의원이 나경원 전 의원과 박영선 장관의 <아내의 맛> 출연을 두고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는 것도 이와 무관한 심리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나경원 전 의원이나 박영선 장관에게 방송 출연을 제안한 방송사의 입장이랄 것 역시 우연일 리 없다. 여론조사에서 양당의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인사가 둘 다 여성이라는 점은 <아내의 맛>이라는 프로그램의 기조에도 부합하고, 대중적으로 해당 프로그램을 향한 너른 관심을 끌어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괜찮은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단순히 특정 인사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란 의심은 차치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되리라는 건 자명하다. 제작진도 결코 모르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경원 전 의원과 박영선 장관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두 출연자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 역시 우연일 리 만무하다.


거를 앞두고 합법적인 시기에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을 출연시키면 화제성을 얻을 수 있다는 선례만큼은 <아내의 맛>을 통해 확실히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거에서 인지도는 필요조건이고, 매력은 충분조건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그런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모두 다 충족시켜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과 예능 프로그램은 생각 이상으로 어울리는 짝패다. 역설적이지만 시청자는 논외다. 그저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웃음을 즐기고 말면 될 일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보에게 호감을 느끼고 한 표를 행사하는 시청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결과는 4년간 모든 시민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코 가볍게 생각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예능에서 파는 정치에 쉽게 현혹돼선 안 된다. 정치는, 선거는 복불복 게임이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한 표를 손쉽게 웃음에 내주지 말라. 그 웃음이 당신을 배반하기 전에.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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