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던 90년대에는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배드민턴을 자주 쳤던 기억이 난다. 웬만한 집에 배드민턴 채가 있었고,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여름 저녁쯤 남녀노소 불문하고 배드민턴을 치는 이가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아마 올림픽 영향이었을 것이다.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은 남녀 복식에서 모두 금메달을, 여자 단식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며 파란을 일으켰다. 그만큼 배드민턴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인 만큼 생활체육으로 자리 잡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지난 5월 31일부터 방영하는 SBS 미니시리즈 <라켓소년단>을 보면서 말이다. <라켓소년단>은 제목 그대로 배드민턴 라켓을 든 소년들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다. 땅끝마을로 알려진 해남의 작은 중학교 해남서중은 한때 전통적인 배드민턴 강호였으나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네 명 이상의 부원을 모집하지 못해 대회 참가도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해남까지 내려와 중학교 배드민턴 코치 자리를 얻게 된 윤현종(김상경)은 다시 사면초가에 놓인다.
원래 서울에서 중학교 야구부 유망주였지만 전지훈련비를 내줄 능력이 없는 아버지와 결국 땅끝마을 해남까지 내려오게 된 윤해강(탕준상)은 아버지가 자신의 선수까지 집으로 데려와 숙소처럼 쓰는 통에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다. 그러다 선수 하나가 모자란 배드민턴 부원 방윤담(손상연), 나우찬(최현욱), 이용태(김상훈)는 유년시절 각종 배드민턴 대회를 휩쓴 윤해강의 전력을 알아보고 그의 손에 라켓을 쥐여줄 궁리를 한다. 그리고 승부욕을 자극한 끝에 내기를 건 시합을 제안하고 끝내 방윤담에게 시합에서 진 윤해강은 배드민턴 부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라켓소년단의 진정한 합숙이 시작된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어린 소년들은 각자의 꿈이 있지만 한 팀으로서 같은 꿈을 꾸기도 한다. 저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지만 같은 팀으로서 이겨야 하는 마음도 뜨겁다. 그 뜨거움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마음까지 데우는 온도가 된다. 대부분의 스포츠 서사가 그러하듯이 <라켓소년단>도 그렇게 도전자의 온도를 통해 시청자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응원하고 싶은 이야기로 초대한다. 한 팀으로서 승리를 염원하는 소년들의 마음에 깃든 절실함과 간절함은 순수하게 무언가를 염원하던 시절을 향한 노스탤지어로 환원된다.
드라마, 영화, 만화 등 스포츠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허구 가운데 유명한 작품은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성장하거나, 부활하거나. <슬램덩크>이거나, <록키 발보아>이거나. 그러니까 잘 먹히는 스포츠물의 서사란 도전자의 서사다. 새로운 영광을 향해 전진하는 혈기를 그리거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돌아오는 용기를 그린다. 풋내기도, 퇴물도, 그렇게 도전한다. 그리고 <라켓소년단>은 설익은 풋내기의 도전기 같지만 실상 돌아온 탕아의 도전을 그린 작품이다. 일찍이 유년시절에 대단한 배드민턴 실력자였던 윤해강은 천재적인 재능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배드민턴계의 유망주가 된다. 하지만 비단 실력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승부욕으로 인해 배드민턴을 시작한 윤해강은 점점 알아먹기 힘든 사투리를 쓰는 팀원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비록 손발이 오그라드는 구호를 함께 외치긴 어려워도 라켓소년단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럼으로써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한 팀으로서 함께 승리하길 염원하고 응원하는 법을 다시 깨닫는다. 마음속에 지핀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낀다. 혼자 경기에 나서는 것만큼이나 한 팀이 돼서 경기에 임하는 것 역시 뜨거운 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함께 성장한다.
<라켓소년단>은 라켓소년단의 화합과 성장을 다룬 메인 플롯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긴 서브플롯에도 공을 들이며 서사적으로 소소한 재미를 덧댄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각본을 쓴 정보훈 작가의 작품이란 점에서 이런 특징은 더욱 뚜렷한 인장으로 다가오는데 인물 하나하나마다 깃든 사연을 깨알 같이 세워 넣은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시청자로 하여금 모든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유도하는 드라마였던 것처럼 <라켓소년단>도 마음이 가는 캐릭터들로 그득한 드라마로 다가오는 인상이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푸근한 정감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요즘 보기 드물게 사랑스러운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야흐로 상류층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막장드라마나 억울한 이들의 고구마 같은 사연을 대신 풀어주는 인과응보 사이다 복수극이 ‘모 아니면 다른 모’처럼 양립하는 드라마 시장에서 <라켓소년단>은 실로 이색적인 '도' 같다. 마치 청정 자연에서 재배한 유기농 드라마 같다고 할까.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긴 하지만 불필요하게 감정을 자극하거나 과장된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라켓소년단>은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가 저마다 꿈을 꾸고, 저마다 삶을 살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공존한다.
비록 그것이 허구 속의 마음일지라도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일상과 닮았기에 그런 마음으로부터 전해지는 공감대는 생각 이상으로 너르고 큰 자극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켓소년단>은 여느 드라마보다 조용해 보이지만 심심하지 않고, 여느 드라마보다 소소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다. 애나 어른이나 저마다 살아가는 고민은 나름 녹록하지 않아도 결국 그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대상이 된다. 삶의 결핍을 채워주는 건 결국 또 다른 이의 결핍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배운다. 애도, 어른도, 그렇게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