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자기를 둘러싼 호의와 악의의 총량을 양방향으로, 그것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는 일이다. 어떤 때에는 무의미하게 매도당하고, 어떤 때에는 무의미하게 치켜세워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유명세에 관해 말할 때 이보다 적절한 것이 없다 싶을 정도로 딱 떨어지는 언어다. 그러니까 열광과 혐오는 의외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OTT 서비스 플랫폼 ‘왓챠’에서 국내 독점으로 공개한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한, ‘유명인을 향한 호의와 악의의 총량’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9년에 데뷔해 일약 전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얻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끔찍한 혐오에 시달렸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수렁 같은 삶을 살게 됐는지, 70여분의 시간 안에 일목요연하게 설명해낸다. 그리고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흥망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인 것만은 아니다.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Free Britney’, 즉 ‘브리트니에게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어떤 무리들의 시위 장면을 비추며 시작된다. 이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구속하는 불합리한 후견인 제도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하는 ‘브리트니 해방운동’의 활동가들로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2019년 트위터에서 시작한 ‘#FreeBritney’라는 해시태그 운동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SNS를 통해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며 그녀를 변호하고 운동에 참여할 대중들을 포섭했다.
브리트니 해방운동이라니, 어쩌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다는 연예인 걱정을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트니 해방운동’은 단순히 브리트니 스피어스 한 사람만을 위한 기도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브리트니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활동가들은 지난 13년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후견인 노릇을 해온 그녀의 아버지 제이미 스피어스의 권한을 무효로 만들고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을 자처한 그녀의 아버지가 되레 그녀의 삶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골자다.
미국 법무부에서 인정하는 성년후견제도란 기본적으로 후견 대상인 성인의 신체와 재산과 관련한 의사결정권을 제한하는 조치다. 이는 합리적인 의사 선택이 불가능한 고령의 노인 혹은 혼수상태나 치매 등으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아직 30대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후견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650억 원 이상의 자산가인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후견 기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스스로를 책임질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어쩌다 아버지를 후견인으로 둬야만 했을까? 대체 무엇이 그녀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을까?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슈퍼스타가 되기 이전에 낭랑한 재능을 갖고 있던 유년시절의 브리트니 스피어스부터 시작해 비로소 혜성 같이 팝시장에 등장하며 스타의 지위를 얻고, 수많은 미디어에서 던지는 가십거리나 다름없는 질문과 매일 같이 그녀를 에워싸는 파파라치 사이에서 점차 삶의 주도권을 잃어가는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따라잡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질문을 도출한다.
만약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끔찍한 대우를 받았을까? 단적으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공개연애를 하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뒤 이어진 과정은 앞선 질문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변환하는 답변과도 같다.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결별한 후 그녀의 외도로 인해 상처 받았다는 식의 프레임을 만들며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고, 미디어는 이에 부응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악녀 같은 존재로 만들었고, 섹시스타로서의 지위를 문란하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다양한 푸티지 영상을 통해 각종 미디어가 저널리즘이라는 미명하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던졌던 질문의 저열함을 하나씩 지목한다. 그리고 셀리브리티의 삶을 악명과 오명으로 점철된 가십으로 끌어내리는 황색언론 관계자와 파파라치들의 파렴치한 내면을 직접적인 인터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슈퍼스타의 일상을 착취하며 수익을 올리는데 혈안이 된 이들은 한 사람의 영혼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었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망가질수록 잘 팔리는 상품이었을 뿐이다.
과거 파파라치 문화와 관련한 취재를 하면서 연예인의 연애 스캔들을 파헤치는 것으로 정평이 난 모 매체의 사진기자와 어렵게 접촉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파파라치 사진을 찍으며 배우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갈등을 느낀 적은 없냐는 질문 후 듣게 된 답변으로 인해 1초 정도 뇌가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드라마에 출연하면 큰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의 수입은 당연히 대중의 관심값이 포함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대행하는 존재라는 것이 답변의 요지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 연예인 걱정이다. 이 글은 당장 우리 모두 브리트니 스피어스 걱정을 하자는 것도, 혹은 사생활 침해에 시달리는 연예인을 걱정하자는 권유가 아니다. 다만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사소한 일상까지 조각 케이크처럼 팔린다면 그것은 타당한 것인가.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질문인 것이다. 유명한 사람도 개인이며 그에 준하는 권리를 추구할 자유가 있다. <프레이밍 브리트니>는 우리 모두가 곧잘 손쉽게 간과하는 기본적인 질문과 스스로 마주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멋지고 예쁜 건 그 자체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모두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스타를 좋아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관심이 늘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파괴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라 믿는다. 마치 좋아하는 짝꿍을 괴롭히며 관심을 끌던 미취학 아동처럼 군다. 기이한 일이다. ‘브리트니 해방운동’은 그런 어긋난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맞서는 팬들의 연대를 그린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스타를 스스로 지키는 팬들의 자발적 운동에 주목한다.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권리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세상이 간과하던 권리를 주목하게 만든다.
여자 아이돌은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되지만 한편으로는 순결한 존재이길 종용받는 존재들이다. 연애는 금기와 같다. 모두를 위한 인형이되 누군가를 위한 여자여선 안된다. 개인적인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 배신의 낙인이 찍힌다. 그러니까 이건 어딘가 이상한 일 아닌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이렇게 일방적이라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관계 일리가 없다. 상거래로 치면 불공정거래나 다름없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매일 같이 수많은 채널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브리트니 해방운동은 결국 우리가 소비하는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촉구하는 목소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