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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08. 2022

'스트릿 우먼 파이터' 댄서라는 이름으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무대였다.

재미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성 댄서들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니, 그것도 이런 류의 프로그램으로 어그로 좀 끌 줄 아는 엠넷에서 기획한 것이라니, 심지어 제목부터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라니, 시작 전부터 ‘파이팅’이 넘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방점은 ‘파이터’가 아니라 ‘스트릿 우먼’에 있었다. 1화에서 ‘라치카’의 가비가 바지를 벗을 때만 해도 정말 만만치 않게 센 ‘여캐’들의 ‘쌈박질’이 펼쳐지는 구나 싶었는데 무대 위로 댄서들이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예상만큼 세지만 예상과 다른 싸움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예상보다 훨씬 뜨겁게 시청자의 마음을 달궈버렸다.


원래 이런 류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묘미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누가 올라가고, 누가 떨어졌는지, 이런 당락의 과정에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정작 경연 과정보다도 경연 이후의 결과에 주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응원하는 경연자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몰입하는 것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보는 주요 흥미일 것이다. 하지만 <스우파>는 달랐다. 싸움이 아니라 춤에 진심인 댄서들의 무대를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사로잡았다. 보는 이들의 관성을 멈춰 세우고 다른 경로를 설득했다. 싸움 구경을 하러 온 이들이 춤 구경에 빠져들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회가 끝나면 누군가는 탈락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누가 탈락했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그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스우파>에 빠져든 시청자들은 그 누구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응원하는 크루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크루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찐팬’들은 매회가 끝날 때마다 탈락 크루가 발생한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러한 애정의 발로는 모든 댄서들이 하나 같이 대단한 기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기 다른 개성으로 무장한 댄서들의 무대를 하나 같이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동한 덕분이기도 했다.

실상 <스우파>의 열기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제작진 덕분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인데 역설적이지만 가장 많은 욕을 먹은 것도 제작진이었다. 엠넷에서 제작한 여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편집’ 설도 불거졌다. 물론 영민한 제작진이라면 그러한 반응 자체가 프로그램의 성공을 입증하는 바로미터나 다름없음을 잘 알았을 것이다. 다 떠나서 누구보다도 <스우파>에 진심이었던 건 제작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던 건 <스우파>를 기획하고 연출한 최정남 PD였다.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엠넷이 댄스를 소재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한 건 <스우파>가 처음이 아니다. 2013년에 방영한 <댄싱9>은 다양한 장르의 댄서들이 양 팀으로 나뉘어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고, 2016년에 방영한 <힛 더 스테이지>는 K팝 아이돌 스타들이 펼치는 댄스 퍼포먼스로 경쟁하는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 두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최정남 PD가 참여한 댄스 소재의 경연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다. 2018년에 방영한 <썸바디>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댄싱 로맨스’를 표방하며 남녀 댄서들의 로맨스를 관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역시 최정남 PD가 연출한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우파>는 누구보다 춤에 빠진 최정남 PD가 쏘아올린 진심으로부터 폭발한 거대한 불꽃놀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스우파>를 처음 기획하면서 “아이돌 가수의 안무를 짜고 백업 댄서를 한 분들이니, 아이돌 팬덤의 1/10이라도 이쪽으로 확장되면 좋겠다”던 최정남 PD의 바람은 아이돌 못지 않은 팬덤을 자랑하는 댄서들의 인기로 이어졌다.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댄서들의 시대가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댄서라는 직업 자체가 이렇게 발음되고 조명된 것도 처음이다. 다 떠나서 <스우파> 이후로 SNS상에서 ‘Hey, Mama’ 안무를 따라 추는 영상을 하루에도 12번씩 목격하면서 우리가 댄스의 민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아무도 몰랐다. 제작진도, 댄서들도, <스우파>가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고, 큰 열광을 얻고,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걱정도 있었다. 모든 댄서들이 출연을 기회로 여기고 기꺼이 참여한 건 아니었다. 프로로서 평가를 받고 탈락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런 상황 자체를 견뎌야 한다는 부담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부담감을 이길 수 있도록 댄서들을 설득한 것이 바로 최정남 PD였다. 무엇보다도 무대가 사라진 코로나19 시대에서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댄서들 입장에서는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잘 알다시피 로맨틱, 성공적, 스우파.


<스우파>가 여성 댄서들의 프로그램이 된 건 최정남 PD가 일찍이 여성 댄서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던 덕분이다. 홀리뱅의 허니제이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시작된 섭외는 기본적으로 실력을 고려하고 캐릭터와 성향이 반영된 리스트를 채워 나가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홀리뱅, 프라우드먼, 훅, YGX, 코카N버터, 라치카, 웨이비, 원트까지, 그렇게 모인 여덟 크루는 ‘언프리티 댄스 스타’가 아닌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스타일도, 스피릿도, ‘존멋’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언니들의 싸움에 남녀 불문하고 열광한 건 멋진 춤만큼이나 당당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프로들을 기꺼이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저는 오늘 집에 가지 않습니다.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제 본업으로 돌아가서 저를 지금까지 만들어줬던 사람들에게 다 그 덕을 돌려주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모니카의 말은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로 잠시 유예된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진 것 같기도 하다. <스우파>에 이은 ‘스트릿 맨 파이터’가 나오는 것 아니냐고 예상했지만 발 빠르게 <스우파> 댄서들을 상석에 앉힌 ‘리틀 <스우파>’를 기획한 셈이다. 그러니까 아직 언니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화요일 밤의 열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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