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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12. 2022

생동하는 봄, 역동하는 생을 위하여

생동하는 봄에 어울리는 역동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모두가 꽃이 피길 기대하는 시간에 메마른 잎마저 모두 떨어진 앙상한 가지를 떠올린다면 인성 문제 있냐는 소리나 듣게 될지 모르지만 봄이 되면 늘 가을을 생각한다. 탄생에서 멸망을 목격한다는 의미와 상통하게 들릴 소리에 살 맞는 기분을 느끼는 이도 있겠지만 당연히 봄을 저주하기 위해 가을을 생각할 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훈풍이 불고, 새 순이 돋고, 비로소 진정한 시작점에 섰다는 기운이 불어오는 계절에 그 너머의 생을 떠올린다는 건 그렇게 시작되는 계절을 올해에도 잘 넘겨보자고 다짐하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봄과 함께 떠올릴 만한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주문을 받을 때면 기이하게도 고난과 역경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새롭게 태동하는 생의 의지로 일어서거나 올라서는 이들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를 테면 알폰소 쿠아론이 연출한 우주 SF 역작 <그래비티>와 로버트 레드포드의 과묵한 열연이 빛나는 해양 표류 영화 <올 이즈 로스트> 같은 것 말이다. 두 영화는 우주와 바다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고립과 표류라는 공통분모의 재난을 그린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분명 생의 역동성이 만발하는 계절로 접어든 시기에 걸맞은 영화다. 결코 악취미에서 비롯된 추천이 아니다.

지구가 올려 보이는 우주 궤도에서 허블 우주망원경 수리에 열중하던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우주 배낭 추진체를 타고 유영하며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던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로부터 작업을 종료하고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곧 날아드는 우주 파편들로 인해 우주왕복선이 산산조각 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두 사람은 배낭식 추진장치를 이용해 국제 우주정거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중력도, 산소도, 기압도 없는 ‘무’의 바다를 혈혈단신으로 표류하는 건 ‘생’보다 ‘사’에 가까운 여정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 자신마저 던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비티>는 생의 중력으로부터 멀어지는 한 여자의 끈질긴 역영을 그린 영화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남자(로버트 레드포드)는 눈을 뜬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인도네시아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수마트라 해협 개인용 보트 안에 물이 차오르는 선실이었다. 어디로부터 떠내려온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컨테이너 박스가 보트의 벽에 충돌해 구멍을 내버렸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마땅한 상황에서 남자는 그저 찡그린 얼굴로 고민할 뿐이다. 묵묵히 응시하다, 골똘히 생각하더니, 비로소 움직인다. 그리고 결코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차차 해결해 나간다. 이렇듯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한 남자도 망망대해에서 마주친 거대한 폭풍우 앞에서는 손쓸 길이 없다. 하지만 최소한 살아남는 법을 조용히 이행할 뿐이다. <올 이즈 로스트>는 죽음 위에서 표류하는 한 남자의 과묵한 사투를 그린 영화다.

<그래비티>와 <올 이즈 로스트>는 두 감독의 개인사가 반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닐 암스트롱이 이끄는 나사의 아폴로 11호의 탐사선이 달 표면에 착륙한 1969년, 알폰소 쿠아론은 여덟 살 소년이었다. 유년시절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소년은 비록 우주로 나아가는 대신 지구에서 유년시절부터 좋아했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됐지만 끝내 자신이 꿈꾸던 우주를 영화에 구현하여 꿈에 다다랐다. 물론 <그래비티>를 제작하는 4년여의 과정은 만만치 않았고, 우주영화를 촬영하는 것보다 우주에 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됐지만 <그래비티>를 제작하는 매 순간을 사랑했고, 완성된 영화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올 이즈 로스트>를 연출한 감독 JC 챈더는 19세 무렵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이동하다가 뭉개진 잔해 속에 가까스로 의식을 찾았다. 운전 중 잠이 든 친구로 인해 여덟 바퀴 정도를 구른 자동차는 제 기능을 잃은 뒤였다. 죽음에 직면했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을 끌어내는 손길을 통해 가까스로 구조돼 고속도로 중앙에 눕혀진 뒤 손 끝에 닿는 잔디를 느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낀 순간 찾아온 생의 감각이 아이러니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뒤, 그 찰나에 표류했던 생사의 감각을 영화로 구체화하기로 결심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그 감각에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래비티>와 <올 이즈 로스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다. 그리고 2013년 가을에 나란히 개봉한 두 영화가 각기 다른 환경에 고립된 한 인간의 생존 의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우연이기도하다. 광활한 우주와 광막한 바다에서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긍휼하지만 끝내 영험하다. 대자연의 신비 속에서 먼지처럼 미약하여 손쉽게 죽음으로 내던져지거나 가라앉을 것 같은 인간이 생의 가능성을 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광경이란 두 발로 느끼는 중력의 안위를 온몸으로 전이하는 것만 같다.


“죽음은 생의 한가운데 있다.” 얼마 전 작고한 이어령 교수가 남긴 말처럼 <그래비티>의 라이언 스톤과 <올 이즈 로스트>의 남자는 희박한 생의 끈을 놓고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진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끝에 남은 모든 것을 건다. 죽음을 향해 날아간다. 죽음을 향해 침전한다. 그 순간 비로소 생의 중력이 감지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생을 등지듯 죽음을 향해 모든 것을 걸고 나아가니 생의 가능성이 손을 내민다. 결국 생이란 죽음으로 다다르고 나서야 끝나는 것이기에 끝내 죽음에 다다르지 않은 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봄에는 가을을 떠올리는 것도 좋겠다. 어쩌면 봄이란 1월 1일에 시작한 한 해의 다짐을 보다 단단하게 여밀 수 있는 또 다른 시작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봄에 떠올리는 가을이란 절멸이 아닌 성숙의 계절이자 낙엽이 아닌 밀알의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당신을 위하여, 역동하는 생을 위하여, 무운을 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매거진 <find> 창간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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