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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24. 2022

'파친코' 다시 만난 세계, 처음 만나는 자유

<파친코>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응원하는 선물이다.

1976년, 일곱 살의 한국인 소녀는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소녀는 <신데렐라> 같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도 마차는 없었고, 동화 속 세상이 아닌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바퀴벌레와 쥐가 나오는 좁고 낡은 집에서 동생과 함께 이층침대의 1층에 누워있던 소녀는 언니가 누워있을 침대 2층의 바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우린 망했구나.’ 어린 나이였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미국은 녹록지 않은 땅이었다.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이건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파친코>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곱 살 이후로 미국에서 성장한 이민진 작가가 쓴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다. 부연하자면 이것은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가 아니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190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한국과 일본과 미국의 근현대사를 병풍 삼아 그려낸 한국인 가족 4세대에 관한 연대기이자 디아스포라 스토리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부산 영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어린 선자가 다단한 곡절을 건너 다음 세대로 삶의 바통을 전하는 여정이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지고 오사카와 뉴욕으로 연결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의 조류를 역영하고 때론 자연스레 몸을 맡기며 버티고 살아남아서 그렇게 생을 전승한다. 


“솔직히 말해봐라. 노인네들 고생한 이야기 이제 질리지 않아?”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 <파친코>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다. 주연 캐릭터의 입으로 발음되는 것도 아니라 사소하게 간과되기 쉽지만 이 언어는 극 중 인물의 심리를 넘어 <파친코>라는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대신 설명해주는 질문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된 배경 중 하나인 파친코를 배경으로 매화마다 경쾌한 감각을 주입하는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마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세대와 시절 속에 놓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파친코 안에서 밝고 화사한 표정으로 저마다 춤을 추는 모습은 그들을 둘러싼 실제적인 세계를 지우고 그들 각각의 얼굴을 또렷하게 환기시킨다. 그때마다 소설의 첫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라는 대서사의 입구 역할을 하는 장면이 그 세계와 가장 어긋난 활기로 점철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니까 이토록 낙천적인 춤사위와 만연한 미소로 가득한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는 소설의 첫 문장을 전승한 드라마만의 인장처럼 보인다. 드라마의 야심을 선언하는 세리머니에 가깝다. <파친코>의 공동연출자인 코고나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를 위한 수많은 레퍼런스를 구상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공동연출자 저스틴 전 감독은 서정적인 음색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미된 장엄한 도입부를 구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친코>의 모든 제작과정을 총괄하는 쇼러너 수 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친코>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즐겁고 활기찬 순간이다. 역사 혹은 시대 혹은 세상의 무게를 탈탈 털어버리고 온전히 그 순간을 만끽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찬란하게 조명하는 제의적인 장면처럼 보인다. 이는 당대의 운명에 휘말린 캐릭터를 짊어지듯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도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특히 ‘촬영 내내 웃는 장면이 별로 없었던’ 이민호는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 장면을 촬영하는 시간이 ‘유일하게 행복하고 해방된 시간’이었다고 소회했다. 김민하 역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치열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을 웃으며 즐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거운 순간들을 담아낸 작품이기 때문에 오프닝 타이틀을 일종의 축하처럼 만들고 싶었다. 시청자에게도 ‘즐겁게 웃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활기차다(feel exuberant)’는 감정을 주문했고, 제목이 그 감정처럼 느껴지길 바랬다.” 쇼러너 수 휴의 말은 <파친코>라는 드라마가 놓인 자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파친코>는 애플TV플러스에서 투자하고 배급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다. 미국의 거대 기업에서 운영하는 OTT 서비스 플랫폼에서 만든 드라마다. 한국인 이민자 출신 작가가 쓴 한국인 이민자에 관한 소설이 미국의 자본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한 주요 창작자는 모두 <파친코>의 세계와 접점이 있는 한국인 이민자 세대들이다. <파친코>라는 작품 자체가 낯익은 이방인의 얼굴을 한 작품처럼 느껴지는 건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파친코>의 수많은 흥미로운 면모 중에서도 또렷한 인상을 전하는 요소는 세 나라의 언어가 교차되는 방식이다. <파친코>는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가 두루 등장한다. 지명을 설명할 때에도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가 차례로 나열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한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에서 터를 잡은 이민자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니까 당연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파친코>는 미국 자본으로 만든 미국 드라마다. 여느 할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듯이 국적과 무관하게 영어 대사로 점철된 드라마를 만들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이런 도전적인 선택은 <파친코>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방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또 다른 선언처럼 보인다. 비로소 이방인의 시대를 벗어나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 정착한 후손이 뒤늦게 지난 세대의 삶을 돌아보는 여정에 가깝다. 하지만 <파친코>의 지향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파친코>가 수많은 작품이 조명해온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임에도 온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건 이런 시각과 관점 덕분이다.


어린 선자가 할머니가 되고, 영도를 떠나 오사카에 정착하고, 그 손자가 뉴욕과 오사카를 오가는 또 다른 이방인이 되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지난 20세기를 관통하는 <파친코>는 뿌리가 아니라 뿌리로부터 생장한 가지와 줄기와 잎과 열매를 살피는 작품처럼 보인다. 현재를 사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현재란 과거와 대비되는 시제로서의 현재가 아니라 드라마가 재현하는 그 순간을 의미한다. <파친코>는 플래시백이 없는 작품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이 아니다. 회상을 삽입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에 관한 드라마다. 과거와 현재의 선자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1910년의 선자와 1989년의 선자가 함께 존재하는 작품이다. 물론 1910년의 선자와 1989년의 선자는 동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의 인물이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으로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매 순간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을 그린다. 그러니까 <파친코>는 운명이나 역사라는 인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내는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이어진 지금이라는 시간으로부터 피어나고 맺어지는 현재라는 시제에 관한 드라마다. 

그러니까 이건 ‘노인네들 고생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 소녀도, 노인도 매 순간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이야기다. 역사라는 지난 기록 안에 죽은 듯이 누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로 들어가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과 마주하는 체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가 원작 소설과 다른 서사 구성 방식을 취한 것도 이러한 체험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처럼 보인다. 순행적인 서사로 전진하는 연대기 형식의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지층처럼 쌓인 역사의 단면을 한 번에 아우르듯, 중심인물의 과거와 현재 시제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원작의 서사를 재구성했다. 원작 소설이 대서사를 운용하는 직렬의 구력을 체감하게 만든다면 드라마는 축적된 세월이 잉태한 저마다의 삶이 낳은 결실을 구조적으로 연결하는 병렬의 내력을 만끽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파친코>라는 드라마는 <파친코>라는 원작 소설의 후손처럼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이 이룬 성취를 토대 삼아 새로운 성취를 쌓아 올리는, 단순히 활자가 얻은 명예에 기대고 그 성취를 다른 양식으로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또 다른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 제 길을 찾아간 운명처럼 보인다. 비극적인 역사를 명징하게 살피지만 참담하게 매몰되지 않는다. 과거의 고생담을 끌어와서 현재의 삶을 안도하지 않는다. 비록 그 순간을 좌절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존재했을지라도 어떤 식으로 최선의 삶을 살아온 개인의 삶을 비련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지금도 거듭 다가오는 매 순간을 살아온 개인의 삶을 온전히 마주한다. <파친코>는 그렇게 억척스럽더라도 결코 비극적이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삶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곱씹을수록 좋은 언어다. 다시 만난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란 분명 이런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한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4월 두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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