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없다는 속설은 괜한 말이 아니다.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에는 미련을 버려’라고 했건만 싸이월드가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서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인가 싶어서. 그리고 오픈 당일 우사인 볼트의 발처럼 손가락을 놀려 아이디를 찾아 접속해 내 미니홈피 비공개를 확인했다. 나의 흑역사는 내 거라고. 그렇게 평정심을 회복한 뒤 산보하듯 내가 한때 운영했다는 미니홈피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잊고 있었던 지난날과 대면했다. ‘Me and You and Everyone’이라는 폴더명을 보고 그것이 과거에 만났던 여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전용 폴더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폴더는 비어 있었다. 이름은 있지만 내용은 없는 지난날이 거기 있었다. ‘너와 나와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현재를 상징하듯 그랬다. 물론 당연히 애석함 같은 걸 느끼진 않았다. 다만 나름대로 충만한 애정을 품고 보낸 지난 시절을 조우하는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그만 헤어져.” 그녀가 말했다.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기도 하고, 잉크가 물에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것 같기도 하고, 좀처럼 헤어질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이소라가 부른 ‘바람이 분다’를 덧없이 듣다 보면 절로 눈물이 났고, 김동률이 부른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들으면서 막연한 희망을 품고 마음속으로 재회하는 드라마를 거듭 돌려봤다. 그런데 결국 그녀가 마음을 돌렸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랐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 뒤로 우린 세 번 더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이별을 선언하는 건 유죄 판정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별을 통보받는 쪽의 마음이란 실형 선고를 받는 기분과도 같다. 하지만 사랑도, 이별도 쌍방이 아니다. 일방이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먼저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다섯 번의 이별을 통보받는 과정에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고 싶었던 건 나 역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잠이 안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면증이라는 것을 겪으면서 삶이 피폐해졌다. 절규에 가까운 언어를 싸이월드에 휘갈기듯 썼다.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나와 일촌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볼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다시 돌아와 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정말 자고 싶었다.
네 번의 불면증을 건너가며 끝내 다섯 번째에 헤어질 결심을 한 건 다섯 번째 이별 통보를 받은 그날 밤 너무 잠을 잘 잤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이별 통보를 받고 영문도 모르는 사과를 하는 순간부터 나도, 그녀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우리 관계에 선명한 금이 가 있다는 사실을 지켜보고 있을 뿐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없다는 속설을 신뢰하게 만드는 사례를 쌓고 쌓았다. 그리고 아직도 모르겠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는 이별한 연인이 재회를 꿈꾸는 노래였을까? 그렇지만 아마 안될 거야. 안타깝지만 다들 그렇게 이별한다. 이별했다.
('Noblesse MAN' 매거진 2022년 11~12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