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희사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May 23. 2023

로컬이 아닌 글로벌, K팝의 지금

'보이즈 플래닛'은 동시대 K팝의 영향력을 대변하는 글로벌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인들은 스스로 나아지기 위해 X나게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영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를 수세기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에서 나를 찾아와 ‘맙소사, 한국인의 삶은 너무 힘들어 보여요!’라고 하는데, 맞다. 그게 (한국이) 일을 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K팝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론 그림자도 있겠지만 너무 빠르고 강렬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스페인 유력 일간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RM의 답변 중 일부다. RM이 이와 같은 답변을 한 건 해당 인터뷰를 진행한 현지 기자가 K팝이 과도한 관리와 훈련을 기반에 둔 시스템 안에서 육성되는 상황이라는 지적이 내포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틀린 질문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아이돌 스타를 육성하는 시스템이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은 적지 않게 제기됐다.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으로 귀속돼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춤과 노래를 수련하고, 매월마다 평가를 받으며 데뷔 가능성의 시험대에 오른다. 그 길이 데뷔할 수 있는 무대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 길에 들어서지 않으면 아이돌을 꿈꿀 수 없다. 이른 나이부터 인생을 담보로 자신의 꿈에 배팅하듯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은 내몰린 듯 절박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꿈을 실현한 이들의 대단한 성공담은 그 고생 끝에 올 낙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RM의 답변은 평소 아이돌 산업에 대한 비판적인 식견을 가진 한국인에게도 납득할 만한 관점을 제시한다. 아이돌 스타를 육성하는 산업이 승자독식의 구조로 아이들을 내몬다고 느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RM의 말처럼 K팝과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너무 빠르고 강렬하게 성장했고,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그림자처럼 드리우는 상황에서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더 가디언>에서는 ‘K팝 신화의 이면을 파헤치다(Exploding the myths behind K-pop)’라는 타이틀로 K팝 산업에 대한 리포트 기사를 발표한 바 있다. 아이돌 연습생을 비롯해 K팝 산업의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이 기사는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경쟁 체제의 가혹함을 큰 원을 그리듯 조망한다.


분명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K팝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쓰는 것이 아니다. “스포티파이에서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K팝’이라는 명칭은 일종의 프리미엄 라벨이다. 우리 조상들이 싸워 쟁취하고자 노력한 품질 보증 같은 것이다.” RM의 말처럼, K팝은, 더 나아가 K라는 알파벳으로 위시한 한국산의 ‘무엇’이든, 지금은 분명 세계적인 유행이라는 언어에 걸맞은 위상을 차지했고 자랑하는 시대다. 해외를 나가보면 그런 인식을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 예전에는 동양인을 본 외국인이 대부분 ‘일본인? 중국인?’이라는 물음으로 국적을 파악했다면 요즘은 대번에 ‘한국인?’이라고 묻는다. 물론 이것을 모두가 일관되게 경험하는 보편적 인식은 아닐 수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영화와 드라마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나비효과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K팝은 한국에 대한 인식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폭발적인 뇌관이었다. BTS나 블랙핑크의 파급력은 단일한 팀의 위상을 넘어 한 국가의 영향력을 이전과 다른 위치로 띄워 올린 사건이었다. 그리고 BTS와 블랙핑크는 그 문제적인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통해 발굴하고 발견한 결과였다. 역설적이지만 애초에 해당 산업에 문제적인 관점으로 가능성을 제한했다면 지금 같은 K의 시대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자도 있지만 결국 그림자는 빛이 있기에 드리우는 것이다. 산업의 건강한 지향점을 논의하는 목소리는 분명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산업이 만들어낸 성취와 결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해석도 과한 건 마찬가지다. 재능을 발굴하고 발견하는 과정은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 같은 세계일 수 없다. BTS나 블랙핑크처럼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K팝 그룹이 등장한 건 가혹한 경쟁 체제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는 산업이 만들어낸 결과다. 필연적으로 개선할 것을 개선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그 세계는 경쟁이라는 언어를 배제할 수 없는 세계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과하지만 선별과 선택 이후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이가 되는 자와 되지 못한 자의 명암이 가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데뷔한다고 해서 모든 아이돌 그룹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주말에 하는 음악 프로그램만 봐도 평소 들어보지 못했던 아이돌 그룹이 적지 않다. 연습생 시절을 견뎌내고 비로소 데뷔한다 해서 모두가 다 스타가 되는 건 아니다. 유명한 메이저 기획사에서 육성한 아이돌 그룹과 중소 기획사에서 육성한 아이돌 그룹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 데뷔 전부터 큰 관심을 받는 메이저 소속사 아이돌 그룹은 첫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스타다. 상대적으로 소속사의 자본력이 약하고, 마케팅 지원이 미약한 중소 기획사 출신 아이돌 그룹은 데뷔와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처럼 느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데뷔 전부터 방송에 출연해 개인적인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팬덤을 등에 업은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다는 건 중소 기획사 연습생 입장에서는 천운 같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21세기 버전의 ‘스타탄생’이나 다름없다고 할까.


최근 엠넷에서 방영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이즈 플래닛>은 지난 2021년에 방영한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이하 <걸스플래닛>)의 후속편 격의 프로그램이다. 기존의 <프로듀서 101>처럼 다양한 기획사의 연습생들이 참가해 최종적으로 9명 정원의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되기 위해 거듭 경쟁한다. 다만 <걸스플래닛>이나 <보이즈 플래닛>이 기존의 <프로듀서 101>과 달라진 건 한국인 연습생 그룹과 외국인 연습생 그룹을 나눈 경쟁 구조로 경연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걸스플래닛>은 참가한 멤버의 한중일 국적에 따라 각각 K그룹, C그룹, J그룹으로 나눠 경연을 시작했고, <보이즈 플래닛>은 K그룹과 G그룹으로, 한국 로컬 출신 연습생과 글로벌 국적의 연습생을 구분한 경쟁 구도로 경연을 시작했다. <프로듀서 101>에서도 한국 국적이 아닌 외국 국적의 연습생이 출연한 바 있지만 <걸스 플래닛>과 <보이즈 플래닛>은 연습생의 국적을 확실하게 나눠 표기했고, 이는 K팝의 위상이 한반도를 벗어나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하는 시청자 팬들을 ‘국민 프로듀서’라 지칭하던 <프로듀서 101>과 달리 <보이즈 플래닛>은 ‘스타 크리에이터’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야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이즈 플래닛>에서 가장 흥미로웠다고 생각한 장면은 지난 2월 16일에 방영한 3회에 있었다. G그룹에 포함된 연습생 중 7명 멤버로 경연팀을 꾸린 G팀은 한국계 캐나다 국적의 나캠든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모두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회의 중 6명의 중국인 연습생 멤버들이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탓에 나캠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고, 이 상황은 중국인 멤버가 한국계 미국인인 나캠든을 따돌린다는 의혹으로 이어져 스타 크리에이터의 공분을 유발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해당 장면에서 중국인 연습생 멤버들이 보인 태도 여부가 아니라 K팝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중국어 일색의 장면이 연출됐다는 사실이다. 물론 유명한 K팝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서 한국 국적이 아닌 멤버들이 즐비한 만큼 K팝이 한국인의 목과 몸으로만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각성 같은 것을 부르는 인상이었다. K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렇듯 K팝의 ‘K’는 분명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K팝을 부르는 이가 꼭 한국인이 될 필요는 없다. 정말 ‘팝’의 영역으로, 더 열린 세계가 된 것이다. 인종과 국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물론 K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 한국으로 온 이들에게 언어의 장벽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이 중요한 허들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이는 결국 K팝의 영향력이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입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 같다. K팝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 한국으로 와 연습생 생활을 하며 한국의 문화를 경험하고, 한국어를 익히는 과정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여정일 것이다. 결국 K팝을 통해 한국에 익숙해진 이들이 늘어난다는 건 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하나라도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K팝 아이돌이 되길 꿈꾸는 이들뿐만 아니라 K팝을 즐기고 애정하는 팬들에게도 해당되는 현상일 것이다. K팝을 좋아하는 이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갖게 될 것이며 더욱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한국과 관련한 더 많은 것들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러니까 노래 하나가 잘 팔리는 것을 넘어, 아이돌 그룹 하나가 성공하는 것을 넘어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매력적인 브랜드처럼 느끼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RM의 말처럼 K라는 프리미엄 라벨로서 한국을 인식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즈 플래닛>이나 <걸스 플래닛>은 동시대 K팝의 영향력을 대변하는 사례나 다름없다. 물론 혹자는 의아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있는 걸까? <보이즈 플래닛> 파이널 생방송을 앞두고 발표한 중간 순위 현황 총투표수에 따르면 글로벌 투표수는 3,443,787표였고, 한국 투표수는 869,321표였다. 이는 파이널 생방송을 3일 앞둔 17일 오후 3시 기준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더 많은 투표수가 발생했을 텐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글로벌로 분류된 투표수가 국내 투표수의 네 배에 달할 정도로 높다는 사실이다. 최종 1위를 차지한 멤버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멤버 장하오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K팝은 한국에서 시작됐고, 여전히 한국을 기반으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젠 확실히 ‘로컬이 아닌 글로벌’ 문화로 우리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K팝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때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우선순위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도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징후가 느껴진다.


<보이즈 플래닛>에서 데뷔조로 선택된 9명의 멤버는 ‘제로베이스원’이라는 이름으로 2년 6개월 동안 활동할 예정이다. 엠넷에서 호기롭게 선언한 것처럼 5세대 아이돌을 이끄는 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경쟁의 무대는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영광을 누릴 자격을 증명할 차례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로컬이 아닌 글로벌 팬덤을 가진 아이돌 그룹으로서 K라는 프리미엄 라벨을 달고 출발선에 서있다. 그만큼 귀추가 주목된다. 제로베이스원은 한동안 느슨했던 한국 남자 아이돌 그룹의 지형에 새로운 긴장감을 줄 수 있을까. 실로 궁금하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2023년 5월 두 번쨰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프' 결국 사랑하기 위해 '성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