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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01. 2024

'파묘'는 새로운 미끼를 던지지 않았다

새로운 문법이 아니라 재확인에 가까운, <파묘>의 천만 흥행에 관하여.

요즘은 개봉을 앞둔 영화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이 드물다. 한때에는 잦은 일이었다. “요즘 어떤 영화가 재미있어요?”라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대체로 영화에 도통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렇다. 그런데 정말 험한 것이 나오긴 나왔나 보다. 개봉 전부터 <파묘>에 관한 질문을 적지 않게 들었다. 심지어 칵테일을 만들던 단골바 바텐더도 물었다. “<파묘> 어때요? 재미있어요? 많이 무서워요?” 낯설었다. 천만영화의 징후는 그렇게 일찍이 나타났다.


한국영화의 위기 혹은 극장산업의 위기라는 말은 엄살이 아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이나 2021년의 극장 관객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회복됐다고 볼 수 있지만 팬데믹 이전 상황과 비교하면 여전히 한참 모자란 숫자다. 앞으로 차차 나아질 것이라 전망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4년간 버틸 만큼 버틴 영화계의 하소연도 괜한 것이 아니다. 개봉하지 못한 작품이 밀려 있지만 극장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만큼 눈치게임이 이어졌다. 투자 규모가 큰 작품은 큰 작품대로, 작은 작품은 작은 작품대로, 하나 같이 어렵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빌리버블’한 기록도 이어진다.


지난해 5월과 11월에 개봉한 <범죄도시3>와 <서울의 봄>에 이어 올해 2월에 개봉한 <파묘>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세 편의 천만영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영화나 극장의 봄이 왔다고 속단하긴 이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통계에 따르면 <범죄도시3>부터 <파묘>까지 천만영화 세 편이 등장한 지난해 3월부터 올해 3월 사이, 1년여 동안 1억 3천만명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한해동안 2억2천만명 이상의 관객이, 2018년에는 2억1천만명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으니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의 회복세는 더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이너 장르로 분류되던 오컬트 영화 <파묘>는 천만영화가 된 것일까?

엄밀히 말해서 천만영화의 비결 같은 건 쉽게 정의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천만영화는 하나의 현상이다. 어떤 버튼이 눌려서 뭔가 작동하긴 했는데 그게 대체 왜 눌린 것인지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결과에 가깝다. 게다가 오컬트 장르로 분류되는 <파묘>의 천만 흥행은 다분히 이색적이라 더더욱 묘연한 성취다. 가설을 세워보자. 한국 관객들이 오컬트 신드롬에 빠진 걸까? 그렇다면 <파묘> 이후로 오컬트 영화가 연이어 흥행한다면 그 가설은 참으로 증명될 것이다. 장담하건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파묘>의 성공은 <파묘>의 것이지, 오컬트 장르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파묘>에 현혹됐을까? <파묘>는 어떻게 물고 싶은 미끼가 된 걸까? 정말 험한 것이 나와서? 내가 들었던 <파묘>에 관한 질문 중 팔 할은 ‘얼마나 무서운가?’였다. ‘오컬트’라는 호러 장르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무서운 것’이라는 인식 정도는 확실했다. 하지만 <파묘>는 생각만큼 무서운 영화가 아니다. ‘험한 것’을 보고 느끼는 감상의 상대차는 있겠지만 그것에 짓눌리는 공포보단 그것을 구경하는 쾌감이 보다 큰 작품이다. 그래서 오컬트 장르에 익숙한 정통팬은 저평가할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오컬트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하고 이색적인 오락 영화로 받아들여진 경향이 다분하다. 


<파묘>와 비교할만한 흥행사례를 예로 들자면 또 다른 천만영화 <부산행>이 적절해 보인다. 대한민국을 좀비물 강국(!)으로 이끈 <부산행>은 좀비라는 괴물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사정을 비좁은 열차 안에 몰아넣고, 그곳을 압축된 사회상으로 변환한다. 생존의 서스펜스를 즐기고,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낸다. 장르를 사회적 관점의 그릇으로 담아낸 <부산행>의 서사 전략은 역사 인식을 인용하고 전면에 내세워 해당 소재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파묘>의 전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는 장르적인 팬덤보다 너른 대중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데 유효한 작법처럼 보인다. 

한편 <파묘>는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을 비롯한 케이퍼 무비의 다른 버전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많은 이들이 <파묘>의 속편을 기대하는 건 스토리보다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팀을 만들어 범죄행위를 하는 캐릭터의 매력이 관건인 케이퍼 무비 장르와 유사한 매력이 <파묘>에 있다. <파묘>의 흥행 이후로 몇몇 캐릭터의 행동이나 대사가 심심찮게 패러디되는 것 역시 이런 영화적 장점을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그만큼 오컬트 영화의 마력보다는 이종적인 전략과 매력을 접목시킨 결과가 <파묘>의 대중적 성공을 설명할 때 보다 적절해 보인다. 


물론 한국형 오컬트 영화라는 성취도 있을 것이다. <곡성>을 보자. <곡성>과 <파묘>는 한국의 전통 굿 장면이 등장하는 국산 오컬트 영화라는 점 외에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 안에서 해석되는 기이한 대결 구도 양상을 오컬트 장르로 내재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 위에 놓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러한 뉘앙스가 두드러질 뿐, 직접적인 역사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그러한 양상을 오락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휘발하지만 누군가는 적극적인 해석의 여지로 받아들이며 상영관 밖에서 대화를 주도한다. 굿판을 벌인 뒤 벌어지는 난장의 스케일이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고 한편으로는 모호하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어찌 됐건 볼거리도, 말거리도 확실하다.


<파묘>가 새로운 흥행 공식을 만들었다는 말은 그래서 식상하다. 오컬트 영화로서 새롭게 주목받았다고 말하기엔 <파묘>는 여전히 한국형 ‘무엇’의 성공사례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흥행한다면 그런 한국적인 ‘무엇’이 외국 관객에게는 더더욱 생경한 볼거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 같은 극장가 사정을 고려한다면 <파묘>의 천만 흥행은 더욱 놀라운 사례일 수밖에 없다. 물론 험한 것을 천만 관객이 물고 싶은 미끼로 만들었다는 건 분명 예사롭지 않은 성취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물고 싶은 미끼를 무는 법이다. <파묘>는 새로운 미끼를 던지지 않았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블렌딩, <파묘>의 천만 흥행을 이끈 비결을 굳이 가려야 한다면 거기 걸겠다.


('Noblesse MEN' 매거진 2024년 5~6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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