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May 30. 2024

다시 사랑하고, 살아가는 꿈

'이터널 선샤인', '해피 투게더', '패스트 라이브즈'의 사랑과 기억.

봄에 틔운 것들은 가을에 지는 법이다. 만연하던 여름도 끝내 겨울로 앙상해질 운명이다. 계절도, 자연도, 그렇게 성실하게 제 길을 가는 시간 속에서 꾸준히 오고 간다. 만남과 헤어짐도 그러한 계절과 자연의 이치를 닮았다. 문제는 계절이나 자연처럼 순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멈추지 않는 시계가 무색하게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미련에 사로잡혀 유령 같은 기억을 맴도는 마음이 저물 줄 모른다. 이미 고통으로 변절한 환희의 시간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홀로 견딘다. 

이터널 선샤인

“로맨스를 다룬 영화는 대부분 관계의 장애물을 다루고, 일단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가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만큼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의 말처럼, 현실의 사랑은 ‘달디달고 달디단’ 로맨스 영화와 사뭇 다른 세계다. 2004년 밸런타인데이 출근길에 갑작스러운 충동을 느끼고 회사가 아니라 몬톡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 조엘(짐 캐리)은 2월의 추운 해변에서 우연히 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종잡을 수 없는 대화 속에서도 모종의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얼어붙은 호수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연인 같은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차오른 호감에는 뜻밖의 비밀이 있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이터널 선샤인>에서 언급되는 니체의 격언처럼, 기억하는 자의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은 망각일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렇기에 기꺼이 망각을 선택한 어느 남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과정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은 것이다. 집의 한구석이 음울하다고 벽을 부수기 시작하다 끝내 무너지는 지붕을 바라보며 뭔가 잘못됐다고 깨닫는 순간 이미 늦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버리고 싶은 마음은 결국 다른 것이지만 이미 그것을 알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세계에서 깨어날 운명이다. 하지만 모든 인연이란 애초에 어디서 어떻게 닿을지, 아무도 모르는 사연이다. 지워진 기억은 관계의 끝을 새로운 출발선에 세운다. 다시 한번 사랑을, 고통을 받아들인다.

해피 투게더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97년 이전의 홍콩은 이제 없다는 것. 양조위가 홍콩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안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는 그대로 끝나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모른다.” 왕가위 감독은 아르헨티나를 순회하는 로드무비를 찍고, 탱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계획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찾았다. 물론 당대의 스타배우였던 장국영과 양조위에게는 게이 로맨스물을 찍을 것이라는 동의를 얻은 뒤였다. 하지만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었다. 홍콩으로 돌아갈 길이 요원한 영화 속 두 청년처럼 <해피 투게더>도 어디로 다다를지 알 수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이국적인 풍경에서 왕가위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도 같은 심정을 떠올렸다. 거칠게 쏟아지는 감정에 투신해 버린 탓에 이국까지 떠밀려온 두 남자의 정처 없는 여정은 끝내 그들을 서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처럼 밀어낼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는 긴 시간 동안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 끝내 아르헨티나까지 와버렸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너무 멀리 와버린 두 사람은 그곳에서 다시 헤어지고, 또 만난다. 마치 아무리 조각을 내도 양극으로 맞붙는 자석처럼 끈질기게 맞붙어 서로를 끔찍하게 그리고 미워하고 끝내 사랑한다. 하지만 지긋지긋하게 이어질 것 같던 관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찰나가 스민다. 누군가는 완벽하게 떠날 채비를 마치고, 누군가는 빈자리에 홀로 남겨진다. 그렇게 서로 잃어버린 고향처럼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다만 떠나야 한다면 온전히 새로운 곳으로, 세상의 끝에 그 마음을 묻어둔 것처럼 확실히 떨어져 나가고, 멀어져야 한다. 그 이후에 어떤 세상이 찾아올지 알 수 없겠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설사 거기서 다시 만난다 해도 그곳은 예전의 그 마음도, 그 세계도 아닐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이 영화의 악당은 인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다. 두 주인공 남녀는 서로에게서 어린아이와 다 자란 어른의 모습을 같이 본다. 그게 바로 인생의 모순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모순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는 의식처럼 끝난다.” 셀린 송 감독의 말처럼 <패스트 라이브즈>의 악당은 서울과 뉴욕의 시차와 거리일 것이다. 12살 유년 시절 타향 만 리로 건너간 소녀를 사랑했던 소년은 12년 후 SNS를 통해 안부를 묻고 비대면으로 재회한다. 당장의 반가움에 날을 지새우며 대화를 나누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모니터로 마주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 없는 아쉬움은 다시 서로를 밀어낸다. 그리고 다시 12년이 지난 후 뉴욕에서 소년, 소녀를 만난다.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은 그렇게 24년 만에 재회한다.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린 이미 인연이 아닐까? 그땐 우린 누굴까?’ 한때 반갑고 사랑스러웠기에 끝내 애틋하고 애석해진 인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의 인연이 유구하게 스쳐 지나간 지난 삶으로부터 가능해진 기회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까? 뜨겁게 갈망하는 지금이 끝내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 불행을 어떻게 환기해야 하는 걸까? 생의 다음 단계가 존재하는 것인지, 지금의 생 이후라는 게 허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을 꿈꿀 수 있다면, 약속할 수 있다면, 그건 결국 지금의 생을 보다 충만하게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닿지 않을까? 그 ‘만약’이 우리의 지금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자는 다짐과 맞닿지 않을까? ‘그때 보자’는 인사가 덧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해도 그렇게 전해진 마음이 헛되진 않을 테니까.

‘만약’이란 끝내 현실에서는 지극히 낭비적이고 부질없는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상상한다. 되돌릴 수 없는 시계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잠시 살아본다. 그렇게 ‘만약’의 시간을 탐닉한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기억 속으로 투신한다. 세상에 이리도 많은 ‘만약’이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로 쓰이고 만들어지는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기어이 찾아가고 마는 거짓의 시간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상한다. 그럼으로써 또 한 번 다짐하는 것이다. 다시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 다시 꿈꿀 수 있도록. 비로소 다다른 당신의 삶을.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램북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