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앤씨 (엘렘 클리모프, 1985)
재현은 필히 고통을 회상시킨다.
그렇기에 재현에는 태도가 중요하다. 재현에 집중하다 보면, 고통을 대상화하고 관음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을 나쁘다 말하면서 미디어 속 폭력을 목도하길 즐긴다. 그것은 가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감독은 전쟁을 고발하는 것이 분명하다. 고발하기 위해 전쟁을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영화들과 다르게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위해 마치 그때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 것처럼 보인다.
왜 그랬을까? 왜 감독은 이 정도의 사실감을 목표했을까?
영화의 제목은 '컴앤씨'이다. 와서 목도하라는 것이다. 전쟁이란 것이, 우리가 보고 즐길 수 있는 폭력인가?
폭력이란 것은 그 한계가 없고, 인간은 상황이 주어지면 얼마든지 자행할 수 있다.
영화 촬영이라는 상황만으로 연기자들이 자행한 폭력이 이 영화의 동력이듯 말이다.
전쟁은 스펙타클이 아니다. 볼거리가 아니다.
어찌 매스껍지 않을 수 있겠나. 내가 정말로 이 땅에 악마를 다시 한번 소환할 테니, 와서 목도하라.
나는 감독의 가슴 찢어지는 눈물 마른 분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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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2차 세계대전 나치군에게 초토화된 벨라루스의 소년병을 비춘다.
오프닝으로는 마을의 꼬마 친구와 함께 해변에서 막연하게 땅을 파내는 주인공이 보인다.
주변에 널려있는 파편들을 보았을 때 이곳은 전장이었고 어쩌면 군인들이 죽어서 널브러졌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서슴없이 파내며 총을 찾으려 한다. 총이 있으면 입대를 시켜주기 때문이란다.
군인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 한참 어려 보이는 꼬마친구는 주인공을 다그친다.
군인이 되려는 이유는 논리보다 의협심에 가까워 보인다.
절차도 없다. 군인들이 마을을 방문해 젊은 남자면 데려가는 것이다.
보수도, 예의도 없다. 심지어는 먹을 것을 내놓으라 한다. 엄마는 가지마라고 절규하지만 소년은 기쁘다.
그를 끌고 가는 마차를 뒤따르던 꼬마 친구는 떼어내 진다. 묘한 기운으로 멀어지는 꼬마 친구..
자진해서 끌려간 군부대는 분명 무엇인가 이상하다. 많은 군인들이 너무나도 익숙한 채로 비상식적인 모습과 공간 속에 생활하고 있다. 다들 많이 다치거나 거칠지만 왜인지 그들은 즐거워 보인다.
선임병들의 거친 생활에는 어딘가 고장 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기에, 멋쩍게 녹아들지 못하던 소년은 임무보다 잡무에만 배정되며 겉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그나마 길게 살게 한 것일까?
이 전장 속에서 인간성의 유일한 끈이 되어준 여자친구. 사실 그녀의 상황을 암시하는 여러 연출 속에 이미 그녀도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진 않지만, 그럼에도 소년이 느낄 수 있는 환상의 끈이 되어준다. 그렇기에 그녀와 놀며 지내는 시간의 중반부는 다소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어쩌면 평범했을 사랑 비슷한 것이 유난히 환상처럼 보인다. 현실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 중반부는 영화 멜랑콜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나른한 환상을 끝으로, 참혹함이 쏟아진다.
상상으로도 단정하고 싶지 않은 참사가 화면에 놓인다. 설마?라는 생각만으로 섬뜩한 것이 아무래도 맞는 듯 놓여있는 연출에서 나는 이 영화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두려워졌다.
그리고 어쩌면, 몽환적인 이전 시퀀스와 이어져서 마치 '판의 미로'처럼 온갖 은유로 이 슬픔을 나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영화는 지옥을 구현해 내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구현의 정도와 직시성에 있다.
이 영화는 악마를 고발하고 일갈하고 저주하기 위해 악마를 소환한다.
화마를 하기 위해 역사 속에 봉인된 악마를 일으켜낸 것이다.
나치의 악마성을 재현하기 위해, 아무래도 이 현장은.. 나치군이 되살아났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당황스러운 점은 이런 것이다. 소가 총에 맞아 죽는 씬을 위해 아무래도 소를 죽인 듯하다.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더라도, 동물 윤리에는 한참 벗어나 보이는 장면. 그렇기에 얻어진 리얼리즘)
또 군인들에게 쏟아지는 포격을 촬영하기 위해 정말로 포격을 한다. 보통의 전쟁영화에 나오는 가상의 폭약보다 몇 배는 되어 보이는 폭발력이 관객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너무 리얼하다. 왜냐면 진짜로 터트리고, 총을 쏘았으니까. 그렇기에 이 화면은 이미 영화가 아니게 된다.
조금씩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지는 재현. 폭력의 재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이후 설명하기 어려운 참극이 긴 시간, 가까이 일어난다. 현실에 너무 가깝다.
카메라는 멀다. 피사체와 멀다는 뜻이 아니다.
화각을 좁혀서 통제된 구역에서만 악마성을 재현한다면 우리는 제압 가능한 선에서의 불장난을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나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장 전체를 찍는다. 이미 진압할 수 있는 불의 규모가 아니다. 정말로 화마가 소환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실감을 주는 점은, 수백 명의 나치군 연기자들이 이 악마성에 취해있다는 것이다.
마치 촬영 기간 동안 큐사인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큐 3일'의 비결도 그러하듯, 카메라가 옆에 있고 촬영 중이라는 의식은 2,3일 내에 흐려진다고 한다.
이 영화 속 리얼리즘은 조직된 연기의 합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영화 촬영이라는 허가 아래에 윤리적인 구속을 벗어난 쾌감을 분출하는 장면들을 찍어낸 느낌에서 온다.
주인공은 입이 붙어버린 듯, 너무나도 늙어버렸다. 파괴된 정신은 히틀러의 선전 액자를 향한다.
그를 향한 씻을 수 없는 분노는 총탄으로, 음향으로, 영화로 역사에 박힌다.
총성은 나치에 관한 필름들이 역재생시키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역사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무로 돌려간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분노가 히틀러라는 개인에게, 일어난 역사에게 쏟아지며 되돌린 끝에 아기 히틀러가 나온다.
흔한 농담이 있다. 타임머신을 개발한다면, 아기 히틀러를 찾아가 죽이겠다는.
그러나 아기를 죽인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악마는 무엇인가. 애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쏘아댄 건 고작 선전 액자고, 선임병 사는 어서 따라오라고 소리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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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에서 다시 숲 속을 진군하는 병사 무리를 뒤따르는 핸드핼드의 카메라는 숲 속을 재빠르게 누비다가 숲 끝에서 멈춘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지역인 듯 땅에 묶인 듯, 행군의 뒷모습을 비추다 하늘을 본다.
나는 영화의 시작에서 소년과 놀던 꼬마아이가 생각났다. 이 시선이 무고한 그 아이의 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