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낭만이 깃들기를
'이 책, 읽기 아까워'라는 감정을 이해할까? 너무 좋아하는 책이여서 읽기 아까운. 너무 반가운 캐릭터여서 만나기에 설레는, 그래서 아끼게 되는 책이라고 하면 이해할까?
이 책이 나에겐 그랬다. 아까울 만큼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서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고. 빨리 읽고 싶으면서도 늦추고 싶은 이상한 감정. 아마도 앤이여서, 앤의 이야기여서 이런 감정이 드는건 아닐까 싶었다.
엄청난 수다쟁이에 엄청난 상상력과 호기심을 갖고 있는 앤. 세상에서 최고로 긍정적인 앤, 이런 앤이 나는 최고로 좋다.
어렸을 때 만화로 봤던 앤은 불쌍했고, 아줌마는 냉정하고 쌀쌀 맞으며 앤에 대한 오해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만화도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채널이 많지도 않았고, TV에서 만화만 해도 좋았기 때문에 드물게 보기만 했지 기다리던 만화는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앤을 좋아하게 된건 어려서 봤던 앤 보다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알게 된 앤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으로 많은 책들이 나오지만, 처음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으로 책이 재해석되고, 재판되어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신선했었다.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책인데, 어른을 위한 거라고? 그때는 그런 컨셉으로 신데렐라를 재해석하고 백설공주를 재해석했으며,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재해석 했다. 대부분이 공주이야기. 공주신드롬에서 여자의 삶으로 살길 바라는 공주신드롬은 그저 동화임을 유머와 함께 섞어서 재해석한 책들.
이렇게 재해석 한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으로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원본 그대로를 성인이 되어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의 차이에서 '성인을 위한 동화'라는 것은 이런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앤에게
황혼의 커튼이 내리고
별 하나 그 위에 걸릴 때
기억하라, 너에게는 친구가 있음을
비록 먼 길을 방랑하고 있을지라도
이 책에는 이런 낭만이 있다. 이런 낭만을 읽으면서 나 또한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친구가 있음을.
그 친구가 멀리 있지 않음을.'
이렇게 쓰면서 내 친구를 생각해봤다. 그녀에게 내가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녀에게 생긴 그 아픔들과 상처들이 나로 인해 잠시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랐었다.
어떤 책인들 이렇지 않겠냐만은, 앤은 '당신'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성인이 되어서 느끼게 되는 것들,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어가며 삶속에서 겪는 모든 경험들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것들이 '낭만'으로 승화되기를 잠시나마 바라봤다.
팍팍한 일상을 사는 모든 그대들의 시간 중에서 '낭만'이라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보면 어떨까. 아니면 낭만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앞으로 알아야 할 온갖 것을 생각하면 신나지 않으세요?그럼 살아 있따는 게 정말 즐겁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에는 흥미로운 일이 가득하잖아요.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게 없이 다 알고 있다면 재미가 반으로 뚝 줄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상할 여지가 없잖아요."
"예쁘다고요? 예쁘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아름답다는 말도요. 그러 말로는 한참 부족해요. 아,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말이 좋겠어요. 여태껏 제가 뭔가를 보고 더 멋지게 상상할 수 없었던 건 그 길이 처음이에요. 여기가 가득찬 느낌이었어요."
아이는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여기가 좀 이상하게 아팠는데, 기분 좋게 아픈 거였어요. 아저씨도 기분 좋게 아팠던 적이 있나요?"
"마음의 친구요. 친한 친구 말이에요. 마음속 깊은 얘기까지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진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있잖아요.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게 평생 꿈이었어요. 정말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제 가장 소중한 꿈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졌으니 어쩌면 이 꿈도 이루어질 수 있잖아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 내일을 생각하면 기분 좋지 않나요? 내일은 아직 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잖아요."
삶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었다.
작은 '칭찬'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교육'만큼이나 좋은 효과를 내는 법이니까.
"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 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리라 믿어요.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 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아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예요."
창밖에 커다란 벚나무가 서 있는데, 무척 가까워서 벚나무 가지가 집을 톡톡 건드려 댔다. 꽃이 한가득 어찌나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나뭇잎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집 양옆에도 꽃나무들이 많았다. 한쪽은 사과나무 과수원이었고 다른 한쪽은 벚나무가 가득했는데, 여기도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나무 아래 풀밭에는 민들레가 여기저기 피었다. 그리고 눈 아래 정원의 라일락 나무에는 보랏빛 꽃이 만발했고 아찔할 정도로 향기로운 라일락 향이 아침 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흘러들었다. 정원 아래쪽으로는 클러버로 뒤덮인 초록 풀밭이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까지 비탈져 내려갔고, 골짜기 안에는 하얀 자작나무들이 우거졌다. 그 밑 덤불 속에서 고사리와 이끼, 숲속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소담스레 자라고 있을 것만 같았다. 골짜기 너머 언덕에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가 초록빛 기설처럼 자라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호수' 맞은편에서 보았던 작은 집의 회색 귀퉁이가 보였다
- 공원 마당에 피어있는 꽃을 꺾어 중학생 손녀의 방에 살포시 가져다 놓은 나여사의 그 라일락. 하교 후 집에 도착해 내 방에 들어섰을 때 났던 그 라일락 향기. 그 시절 그렇게 흙을 밟고 꽃과 나무를 보고 개천의 물을 보며 살았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한 행운.
[2021.03.31 - 2021.05.12]
남들에게는 그저 소설의 배경 뿐이겠지만
난 그 배경에서 나의 어릴적을 만나고
그때의 나여사를 만난다.
보고싶은 나의 할머니, 나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