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때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기에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궁금한 시즌이기도 하지만 출판사와 서점사들에게도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해연도 수상자의 작품뿐만 아니라 수상자 발표를 전후해서 이전 수상자들의 작품들도 다시 관심을 받게 되고 판매량도 소폭 오르는 것 같다.
헤르타 뮐러는 200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아마 <숨그네>가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09년 초라고 하니 그전에 다른 작품들로 이미 인정을 받았을 테지만)
이 작품은 독특한 소설이었다. 1인칭 시점으로 쓰여서인지 마치 실제 경험을 다룬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작가 본인의 경험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작가 후기 및 해설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이야기는 그녀의 어머니의 경험담과 동료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사실상 그의 동료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소에 끌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고도 했다. 그러니 대부분은 실화였다는 생각도 들고,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지고 비굴해지고 비참해질 수 있는지도.
나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목젖이 붓는다.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눈을 제 안경처럼 덧쓰고, 심장삽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석탄은 흐릿하게 보인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pp.96
죽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전리품만 보인다. 시체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다. 입장이 바뀐다면 죽은 사람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 그만큼 착각은 더 심해진다. pp.167
하지만 이 작품을 더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문체와 단어였다. 평범한 소설의 문체가 아니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산문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때론 아름답기도 한 문체는 비극의 순간들마저 차갑게 동결시킨 채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작가가 조합해낸 단어들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주의의 식탁에서 양철이 달그락거렸다. 나는 수프 한 술 한 술이 양철키스라고 생각했다. 우리 각자의 배고픔은 각자에게 낯선 권력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얼마나 잘 알고 있었던가, 그 사실을 얼마나 빨리 잊어버릴지. pp.253-254
일단 제목인 <숨그네> 조차 무슨 뜻인지 몰랐다. 처음엔 그 자체가 독일어인가 싶었으니까. 알고 보니 이 단어는 '숨'과 '그네'의 합성어로 숨이 삶과 죽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네와 같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밖에도 심장삽, 양철키스, 배고픈 천사 등등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다. 특히 배고픈 천사는 작품 전반에서 계속 나온다. 그것은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배고픔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표지그림부터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나는 표지의 인물이 마치 배고픈 천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엔 제목처럼 그네를 타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건 아닌 듯했고,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배고픔은 견딜 수 없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을 그린 듯해서.
주인공은 작품 내에서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아주 극미한 만족마저도 행복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
행복은 갑작스러운 데가 있다. 나는 입의 행복과 머리의 행복을 안다. 입의 행복은 먹을 때 오고 입보다 짧다. 입이라는 단어보다도 짧다. 소리 내어 말하면 머리로 갈 새도 없다. 입의 행복은 입 밖으로 말해지길 원치 않는다. 입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모든 문장 앞에 갑자기라는 말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끝맺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모두 배가 고프니까. pp.272
입의 행복보다 머리의 행복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더 쉽다. 입의 행복은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말이 없으며 몸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머리의 행복은 어울리기 좋아하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방황하는 행복이며 질질 끌리는 행복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오래 지속된다. pp.273
가장 마지막에 오는 행복은 한 방울 넘치는 행복이다. 그 행복은 죽을 때 온다. 이르마 파이퍼가 회반죽 구덩이에서 죽어가던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트루디 펠리칸이 혀를 차며 마치 한 단어인 듯 말했다.
한방울넘치는행복.
그녀가 옳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치울 때면 얼굴에서 안도감을 보았으니까. pp.275
그런데 작품의 배경이 되는 소련의 수용소 생활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독일인들이 소련의 수용소에 끌려간 것인지. 그에 대해선 작가 후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옮겨본다.
1944년 여름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깊숙이 점령해 들어가고 파시즘을 신봉하던 독재자 안토네스쿠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소련에 항복한 루마니아는 그때까지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을 향해 급작스레 전쟁을 선포했다. 1945년 1월 소련의 장군 비노그라도프는 스탈린의 이름으로,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갔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독일인들이 소련(이 작품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으로 강제징용을 당했고, 5년 정도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수용소 생활에 잘 적응했고 현실에 맞춰 살았다. 그러나 그가 반신반의했던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은 그에겐 희망이기도 했지만 때론 절망과 맞붙어 있는 말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 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pp.17
이 책에 묘사된 수용소 생활을 보며 나는 군대 시절을 떠올렸다. 군대 시절은 나의 삶에서 가장 통제되고 억눌렸던 시기였다. 특히나 내가 갔던 해병대는 훈단에서도, 실무에서도 힘든 날들이 많았다. 그때는 오로지 전역일만 기다리며 버텼던 것 같다.
내가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고는 해도 국방의 의무가 없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만약 수용소를 가는 것이 선택이었다면 선택할 사람이 있었을까? 더군다나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조차 알 수 없고,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러나 주인공은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계속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고, 직업을 구하고 결혼도 하는 등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듯했지만 결국 도망쳤다. 그 이후 그의 삶은 불안정했다. 아마 평생 그렇게 시달렸을 것이다. 내가 지금도 군대 복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밤이면 물건들은 나를 추방시키려 하고, 강제수용소로 돌려보내려 하고, 나를 원한다.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므로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배고픔이 괴물이듯 그런 이빨빗바늘가위거울솔은 괴물이다. 배고픔이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물건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pp.37-38
뼈와가죽의시간과 구조바꿈을 뒤로하고, 발레트키, 현금, 먹을 것, 새로 붙은 살과 새 트렁크 안의 새 옷을 걸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없이 풀려났다. 오 년을 통틀어 오늘 내가 말할 수 있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삽질 1회 = 빵 1그램.
절대영도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구조바꿈은 저 너머의 손님이다.
'수용소-우리'는 단수다.
너비는 깊이가 된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사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은 그것들 사이의 고요처럼 철저하면서 증인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pp.292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된,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작품 초반에 수용소로 가기 전에 '랑데부'라고 된 부분이 그것을 의미하는 건가라는 의문은 있었지만 잘 몰랐고, 수용소 내에서의 생활에서도 그런 부분은 나와 있지 않아 확실치 않았으니까. 자신의 성 정체성이 어쩌면 수용소로 도피하게끔 했을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독특했고 또 읽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왜 이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는지를 알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공통점이 보이는데 그게 아마 선정위원들의 취향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