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후기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by 칼란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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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후기에 남기는 책의 표지는 서점사에서 가져오는데, 가급적이면 내가 읽었던 책의 표지로 가져오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리커버도 잦고, 특히 영화화되면 영화 장면을 표지로 하는 경우도 있어서 예전 표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적당한 이미지를 찾을 수는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학 전공이고, 동물행동학으로 UC, Davi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3년간 아프리카에서 야생을 연구했다. 그리고 70세가 되었을 때 첫 번째 소설인 이 책을 출간했다.


저자에 대한 간략한 이력만 알고 이 책을 읽었는데 여러 면에서 예상을 빗나갔다. 번역본이긴 했지만 (번역도 상당히 잘했다) 문체가 담담하면서도 강했다. 묘사는 치밀했다. 그리고 내용도 상당히 뜻밖이었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다. 어느 곳인지 몰라서 지도를 찾아보니 상당히 큰 습지였다.


이곳에 혼자 살고 있는 카야라는 소녀가 있다. 결손가정의 아이이지만 스스로 생존방법을 터득하여 살아나가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가족은 최악이었지만, 카야를 도와주는 여러 사람들이 있어서 힘들어도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었다.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카야는 영민했고 또 재능이 있었다.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빛을 발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마시걸'로 부르며 미개한 야만인 정도로 취급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학교에 다녔던 기간은 단 하루. 그 경험은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혼자 지낸 건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야생에서 배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연이 그녀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다. 그 결과 그녀의 행동이 달라졌다면, 그 역시 삶의 근본적인 핵심이 기능한 탓이리라.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들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로맨스의 가능성은 있었다. 비록 두 가지 모두 그녀에게는 악재가 되었지만.


테이트의 헌신으로 카야도 결국 인간의 사랑이 습지 생물들의 엽기적인 짝짓기 경쟁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지만, 삶은 또한 태고의 생존본능이 복잡하게 꼬인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여전히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의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소설의 전개는 살인 미스터리와 카야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오다가 카야가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에서 합쳐진다. 뒷부분에서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과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말미에서 진실이 밝혀진다.


이 소설의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장소설? 범죄소설? 법정소설? 연애소설? 그러한 여러 가지 들이 어우러져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금방 읽어나갔다. 반전이라는 부분은 좀 약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한).


게다가 저자의 약력이 말해주듯이, 중간중간 자연과 생물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이 투영된 묘사가 많다. 그런데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았다. 노년의 과학자가 자신의 인생과 지식을 불어넣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작가들 중에는 되지도 않는 억지스러운 지식을 욱여넣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게 작가의 집필 의도, 주제의식을 더 부각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억지스러움과 한계 때문에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러지는 않았다. 단지 자연을 통해 그대로 보여줄 뿐.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내가 좀 더 나이가 들어 소설을 쓴다면 델리아 오언스를 롤모델로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건 내 오랜 '장래희망'이기도 하고.


p.s. 이 작품이 영화화되어 아직 국내에서도 상영 중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 중에 원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이 많지는 않기에 기대도 되지만 우려도 된다. 자연과 영상미를 잘 담아내었을까, 꽤 긴 내용을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잘 편집했을까, 카야의 심리를 잘 보여주었을까 등.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것도 나중에 OTT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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