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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an 13. 2023

박완서 <기나긴 하루>


2011년 1월 22일, 박완서 작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가님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뿐이어서 작가님의 작품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문학의 거목'이라는 호칭이 있을 만큼 유명하고 인정받던 분이기에 그 부고가 그냥 예사로이 여겨지진 않았다.


당시에 각 서점사들은 박완서 작가님의 추모전을 했고, 여기저기에서 추모하는 자리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을 몇 권 더 샀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돌아가신 지 12주기가 되었다. 시간이 언제 그만큼 흘렀는지... 사실 그러한 것도 잊고 있다가 독파 챌린지에 <기나긴 하루>가 올라온 걸 보고 생각이 났다. '아, 벌써 12주기구나' 싶은.


이 책은 2012년 1월 20일에 타계 1주기를 기념해서 처음 나왔다. 문학지에 발표는 되었으나 단편집으로는 나오지 못했던 세 작품과 기존에 발표되었던 세 작품을 엮어서 만든 유작집이었다. 


내가 이 책을 언제 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샀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이 책은 계속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책의 출간 정보를 보니 2013년 1월 21일이다. 13쇄 본. 그러니까 적어도 그 이후라는 얘기겠지. 1년 사이에 13쇄를 찍었다면 꽤 판매가 되었을 텐데 (지금은 몇 쇄까지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가님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읽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읽었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것이,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전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작품들은 둘 다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 그 어디쯤에 위치하는 듯, 마치 모두가 사실처럼 여겨졌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
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6·25 때 얘기만 나오면 아이들까지도 궁상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정도로 잊고 싶은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 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pp.32-33


이 작품은 또한 작가님의 가장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집필 당시의 시점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가족사, 결혼 후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난 비통함 등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러한 단편 속에 욱여넣기는 어렵겠지만, 마치 애니메이션 <업>에서 인생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연상되듯 그렇게 적절하게 감정을 녹여가며 쓴 작품이었다.


그런 작가님의 개인사는 <빨갱이 바이러스>에서도 드러났다. 발표한 시점이 2009년인데 그때까지도 작가님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비단 작가님뿐만 아니라 평생 그런 기억과 고통을 갖고 살아가는 분들이 아직도 많겠지만.


다음 작품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고부갈등을 그리지만, 일제강점기에 여고를 다닌 것을 영광의 시절로 생각하는 부류들에 대한 무리들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작으로 실린 세 작품은 1970년대에 발표되었던 비교적 초창기의 작품 두 편(<카메라와 워커>, <닮은 방들>)과 1993년에 발표된 작품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이들은 각각 서울대 김윤식 교수, 신경숙 작가, 김애란 작가의 추천으로 수록된 것이었다.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혹시 그놈의 것의 꼬리라도 어디 한 토막 남아 숨어 있으면 어쩌나 의심해 본 적, 형님은 없죠? pp.209
...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pp.209


이분들이 각각의 작품들을 추천한 이유는 개인적인 연관성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박완서 작가님이 후배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력도 컸기에. 그 작품들을 통해서 작가님께서 기존에 어떤 작품들을 어떻게 쓰셨는지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건, 1970년대의 작품들조차 지금 나오는 작품들과 비교해도 될 만큼 세련됐고, 현대적이었다는 점이다. 


박완서 작가님은 40대가 되어서야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녀들을 키우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다가 비로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고 힘을 주고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에는 통찰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탁월한 묘사와 표현력,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감정의 흐트러짐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의 불편함이 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곧 어루만져 주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려운 시절을 어렵게 살아오신 작가님의 인생에 안쓰러움이 여겨지면서도 그것을 글로 남겨두신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그것이 순수문학의 힘이 아닐까. 그것이 작가님께서 계속 작품을 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위로, 타인에 대한 위로.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그동안 미뤄둔 것이 죄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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