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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4. 2023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예전에 박상영 작가의 '사랑 3부작'을 다 읽고, 마지막으로 그의 첫 번째 작품집인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최근작 <믿음에 관하여>부터 거슬러 올라간 셈이라 사실 순서로 치면 거꾸로 읽은 셈이었다. 그리고 독파에 이 책이 올라왔기에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다소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그간 보여주었던 인물들 및 주제, 작품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퀴어'라는 소재를 너무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작품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일 것 같다. 


물론 이 단편집에는 동성 간의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운다. 그 모든 것을 사랑의 범주로 아우르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도대체 난 왜 이 배은망덕한 개새끼를 찾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이에 뭐 대단한 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그러나 개를 찾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이 개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소라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우는 소라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인 걸까. 잘 모르겠다.
죽을 만큼 싸우겠지. 운이 좋다면 누군가 정말 죽을지도 모르지.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 모든 것을 묵과하고 계속 만나거나, 시원하게 헤어지거나. 선택의 영역에서 나는 언제나 주저하고 주저하다,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버릇이 있다. 상자를 닫아놓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알아서 곪거나 썩거나 터져버리거나 하겠지. 미래의 나에게 이 모든 고민을 떠넘기리라.
우리는 그 많은 추잡한 일들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긴 상대방에게 진실을 숨긴 채 다른 것들을 욕망하며 사는 우리의 관계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이고도 정상적인 커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퀴어는 예민한 주제다. 그가 성수자의 이야기를 쓰는 목적은 명확해 보인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겠지. 하지만 독자에게 이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유감스럽게도 '불호'쪽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 경우에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고, 문학작품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기저에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하다. 특히 성적인 묘사가 그려질 때는 더 그러하다. 이는 비단 동성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 대한 내용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런데 작가로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구태여 그게 자전적인 이야기냐는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아직은 사회적으로 쉽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심적인 부담감이 컸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낼 때마다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1년에 한 편 꼴로 작품집이 나오는 걸 보면 그걸 극복해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는 처음보다는 더 많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순서를 거꾸로 왔기 때문에 그렇게 '피곤함'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작품집은 그의 작품 세계의 '빅뱅'과 같은 것이다. '박상영 유니버스'를 향한 빅뱅.  그리고 그의 우주는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 우리가 보는 그의 작품들은 그의 우주의 모습들 중 일부일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성장, 자아에 대한 성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들 속에서 포기해야 했던 것들, 실패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많은 것들이 과거형으로 등장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딛고 성장한다.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어. 너무 소중하게 여겨서 아무도 가져갈 수 없게 깊이 묻어버렸어.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어디 묻었는지, 그게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난 그때 그 순간으로 말미암아 한 시절이, 인생의 아주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끝나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원한다면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세상의 꽤 많은 것들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절, 다섯 개의 색만으로 무슨 그림이든 그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살갗을 찢어 낱낱이 해부해 버린다. 보지 않아도 될 내장 속 시꺼먼 부분까지 기어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실패라는 경험이다.


그의 유머와 재치, 그리고 표현력은 이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사랑 3부작은 장편 혹은 연작이었던 것에 비해 이 책은 단편집이라 (연작도 있긴 하지만) 좀 더 압축되어 보인다. 그리고 도무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이 책의 제목은 동명의 단편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단편의 제목들도 제목만 보고서는 도저히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읽고 나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를 여전히 재능이 많은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다방면의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도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특정한 주제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다음에는 또 어떤 주제의 작품들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떠나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는 게 내 유일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계속해서 잠들지 못한 채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코앞의 천장이 내 몸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두 팔을 뻗었다. 천장에 손이 닿았다. 차가웠다. 나라는 존재가 아주 무거운 것에 짓눌려 납작해져 버린 기분. 
유리 단지를 찬장에서 내렸다. 세라믹 조각들이 단지 속에서 요동쳤다. 나는 단지를 꽉 끌어안았다. 매끄럽고 차가운 단지의 감촉은 마치 M의 몸과도 같았다. 계속 단지를 안고 있다 보니 마치 그것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내 몸속 어딘가가 차갑게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시리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단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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