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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Dec 27. 2023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은 지도 꽤 된 것 같다. 그 사이 이 책은 100쇄를 넘어섰다고 하고, 한동일 교수도 몇 권의 책을 더 낸 것 같다. 


그는 정말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바티칸 사제이자 바티칸 공소원(로타 로마나) 변호사이자 대학 교수. 현재는 법학자의 일에 더 충실하기 위해 사제직은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라틴어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고, 라틴어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단순히 '죽은 언어'로서의 라틴어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한 삶의 통찰과 인생을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책들이 독자들에게 더 와닿았을 것이다.


그의 신간인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은 마치 잠언처럼,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라틴어 경구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신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이달책으로 구매했다. 선착순으로 저자 친필 서명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받을 사람의 이름과 함께 책 속에 나온 경구 하나씩을 적어 주었다. 나에게 적어준 것은 이것이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본문에서 찾아보았다. 해당되는 곳의 내용을 일부 옮겨본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세가 변화의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인간이 나아가는 다음 단계는 바로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위대한 신성이 있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깊은 곳까지 가보면 얼룩이 먼저 보입니다. 진정 위대한 첫걸음은 그 얼룩을 마주한 뒤에 신성을 향해 다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나를 붙잡고 있는 깊은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이 말씀에 목말라했고 오늘의 우리 역시 말씀이 간절한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이듯, 우리가 깊은 데로 가는 것은 그 심연으로부터 다시 빠져나오기 위해서입니다.


뭔가 알듯 말듯한 말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나를 찾고,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뭔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는 말 같기도 하다.


속표지에는 한동일 교수가 또한 친필로 쓴 글이 인쇄되어 있었다.



모든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겠지만, 이 또한 내게 해주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게 필요했던 것이 그러한 말 한마디였던 것처럼.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운명에 지지 않고, 운명을 가지는 자의 문장 

2장 절망의 한복판에서 새기는 희망의 문장 

3장 그럼에도 끝내 꿈꾸는 자가 품은 문장 

4장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나를 흔들어 깨운 새벽의 문장 

5장 공부하는 자가 벽에 붙여둔 용기와 신념의 문장 

6장 사람이 던진 비수에 피 흘릴 때 읽어야 할 치유의 문장 

7장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한 최후의 문장 



책을 펼쳐보면 왼쪽에는 라틴어 경구들이 원문, 해석, 독음으로 적혀 있고,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정도에 걸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대체로 삶에 용기를 주고 위안을 주는 내용들이다. 라틴어 문법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라틴어 자체에 대한 내용도 많지는 않다. 그 형식보다는 그 내용에 더 집중하고 있다. 사실 라틴어는 그저 거들뿐.


여기에 인용된 라틴어 경구들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있고, 정치인, 사상가 혹은 철학자들이 썼던 글에서 인용한 것들도 있다. 사실 경구 그 자체가 그렇게 임팩트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동일 교수가 설명과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더 와닿는다. 아무래도 그 의미를 파악해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내용들이 더 와닿는 것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보였던 그의 삶에도 힘든 시기가 있었고, 그러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떠올렸던 것들을 옮겼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진다. 그는 이 책의 경구가 독자들에게 인생의 타투처럼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책은 약 38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약간 두툼하게 느껴지는 책이지만 내용 자체가 많은 편은 아니라 읽기가 부담스럽진 않다. 하지만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에 생각날 때마다, 특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기억해 둘 만한 문장을 몇 개 옮겨본다. 이 외에도 좋은 내용들이 많이 있다.


미국의 케네디 우주센터에는 달 탐사를 위해 아폴로 1호에 탑승했다가 산화한 세 명의 우주인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습니다. 그 기념물에는 이런 라틴어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고난을 넘어 별을 향해
Ad astra per aspera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

저는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고난을 '넘어' 별을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난을 통과해야만 별에 이르는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게 됩니다.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이 하늘의 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없는 고난과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우주뿐만 아니라 인생의 별에 이르는 길에도 언제나 고난이 뒤따릅니다. 닥쳐오는 고난들을 직면하고 견뎌내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별에 가닿을 것입니다. 역경에 짓눌려 별에 이르는 길을 잊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문장에는 사실 숨어 있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파도'라는 단어입니다. 키케로의 원문을 후대 사람들이 축약하여 사용한 것인데, 세간에는 이 줄인 문장이 더 유명해졌습니다.

삶이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것들을 잘 감당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나의 소원이나 잘못으로 얻은 것이 아닐지라도, 분명 내 몫으로 책임져야 할 인생의 짐들을 잘 간수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막살지 말고 쉬운 선택을 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대충 살며 쉬운 선택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집니다. 그런 순간들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일러둡니다. 그래도 너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 있고, 살아가려 한다고. 아무리 아파도 살아 있는 동안 희망은 있다고.
저는 그런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 다른 결심을 했습니다. 타인이 내게 주는 상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상처로 인해 툭툭 튀어나오는 나의 모난 태도와 못난 말들을 스스로 용납하진 말자고요. 나의 힘겨움을 핑계로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물론 타인이 나의 상처를 건드린 적도 있지만 그만큼 나도 그들의 감정선을 건드려 메아리처럼 돌아온 상처도 많았습니다. 내 상처를 더 후벼 파지 않기 위해서, 나의 생존을 위해서 '왜 저래?' '저 사람 나한테 왜 그래?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무수한 타인들에게 거칠게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극단적으로 미워했던 타인들은 가난한 내 영혼의 반영이었습니다. 
인생에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찾아온 아픔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인생에 아픔이 이유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의 아픔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이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 보다 발전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이유로 남겨두지 마세요. 아픔을 보호막으로 쓰지 마세요. 그러면 나를 보호한다고 뒤집어쓴 그 아픔이 실제로 내 앞길에 장애물이 되어 삶의 고통을 가중시킵니다.

나와 당신의 일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이 광활한 우주에 어떤 무늬도 남기지 못할 작은 존재임에도, 굴하지 않고 너무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기특하고 갸륵하지 않은가요? 나와 당신의 일상은 이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저는 인생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삶'은 명사 자체로 있을 때는 그냥 삶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떠한 형용사가 붙느냐에 따라 그 삶은 '행복한 삶'일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가릅니다. 우리가 가진 사물, 사람들의 주체를 늘려가려 하기보다. 그러니까 더 많은 명사를 부리며 사는 것보다 내가 이미 가진 명사들에 어떤 형용사를 붙일지 고민하는 인생을 꾸려가고 싶습니다. 인간은 저마다 좀 더 풍요로운 형용사를 가꾸기 위해 매일을 분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대가 사랑해야 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공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혼자 견디는 태도인 고독, '솔리투도 Solitudo'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고독을 마주하기 두려워했고 피해 왔습니다. 하지만 피해 다닌 꼭 그만큼 나의 성숙과 성장도 멈추었지요. 그래서 내 딴에는 최선이었지만 최고의 선택이 되지는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제 솔리투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막의 이정표는 인간의 목마름입니다. 각자 어떤 물을 찾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느 오아시스를 찾아가느냐에 따라 각자의 길은 달라질 것입니다. 광활한 사막에서 길을 찾을 때 모래폭풍 속에 이리저리 발자국을 덧대는 것만으로는 목표점을 향해 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목마름에만 집중하며 물을 찾아 걸어야 합니다. 당신의 그 절실하고 애타는 목마름이 지친 당신을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막막함 앞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마음을 다잡고 첫 문장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긴장되더라도 이 첫 문장을 써내고 나면 한결 긴장이 풀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습니다.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고 그다음 문장이 마지막 문장까지 갈 지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과제물을 작성할 때도, 책을 쓸 때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저는 일단 첫 문장에 대해 생각합니다. 첫 문장만 쓸 수 있다면, 나는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인생이라는 막막한 시험장에서 내가 기필코 써야 할 첫 문장은 무엇일까요?

당신 인생의 첫 문장은 무엇입니까?
모든 터널에 끝은 있습니다. 다만 끝까지 간 사람에게만 한해서, 이것이 터널의 끝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마다 제가 기도하듯 읽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주고 싶습니다. 바로 거기에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끝을 위해서 달리고 있고, 그 끝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그 끝에 다다를 때 우리는 비로소 편히 쉬게 될 것입니다.

Ibi est finis; propter hoc currimus; ad ipsam currimus; cum venerimus ad eam requiescemus.
이비에스트 피니스: 프롭테르 호크 쿠리무스: 아드 입삼 쿠리무스: 쿰 베네리무스 아드 에암 레퀴에쉐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강해』, 열째 강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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