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후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Mar 27. 2024

앨러스데어 그레이 <가여운 것들>

*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보실 분들께서는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특한 소설이다.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포스터를 보고 '이게 무슨 영화야?' 싶으면서도 관심이 생겨 원작을 읽어보게 되었다.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내용도 그랬고, 형식도 그랬고, 인물들도 그랬다. 심지어 이 책의 표지도 그랬는데 표지만 보고선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완독 후에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서문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맥캔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

의학박사 “빅토리아” 맥캔들리스가 손주 혹은 증손주에게 보내는 이 책에 관한 편지

비평적·역사적 주석


서문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가상의 편집자를 설정하여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된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맥캔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고, 이 책에 나온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검증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에서 우연히 이 책과 빅토리아의 편지가 든 봉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본문 격인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맥캔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에서는 아치볼드 맥캔들리스의 입장에서 본 이 사건의 내용들이 전개된다.


그러다가 사건의 당사자이자 아치볼드의 부인이었던 빅토리아가 아치볼드의 책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편지가 첨부된다. 이 편지는 책의 내용에 대해 반전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뒤집어 보게 한다. 그리고 이 편지가 쓰인 날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때이기도 한데 그것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아치볼드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들은 모두 전쟁 중에, 그리고 전쟁 직후 사고로 모두 죽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쓴 비평적, 역사적 주석이 추가된다. 이러한 학술적인 주석은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저자가 마치 실제로 그 책과 편지를 발견해서 이 책을 다시 편집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모두 허구이며, 가상의 내용이다. 그러나 서문을 통해 작가의 말을 믿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의 덫에 이중, 삼중으로 걸리게 된다. 




이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작가이며, 이 작품은 1992년에 발표되었다. 작품의 느낌으로만 보면 마치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 나온 것 같지만 30여 년 전의 작품이라 다소 의외였다. 그만큼 당시의 시대상을 잘 살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작가의 문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도록 한 것도 주효했을 것이다. (번역본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좀 덜하기는 하겠지만)


앞서 얘기했듯, 이 소설은 19세기 가상의 공중보건관인 아치볼드 맥캔들리스가 쓴 자서전적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책 속의 책인 그 이야기는 총 24장으로 되어 있고, 그와 고드윈, 벨라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대부분은 벨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벨라 백스터는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창조물로 묘사된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작품 내에서는 '프랑켄슈타인 괴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여러 서양 고전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관계인 것 같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 유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남겨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여운 것들> 영화의 이미지


고드윈 벡스터(작품 내에서는 주로 '갓'이라고 지칭)는 강에서 투신자살한 임신한 여성 익사체를 되살려 내는데, 뇌가 손상되어 임신 중 태아를 꺼내어 그 뇌를 이식하였다. 그래서 되살아난 벨라는 아무 기억도 없이 태아의 상태부터 발달을 하게 되는데 아치볼드 (작품 내에서는 주로 '캔들'이라고 지칭)를 만났을 시점에는 유아 정도의 지능이었다. 하지만 몸이 이미 성인의 상태였기 때문에 뇌의 발달 속도가 급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의 지능을 갖게 되었다.


고드윈은 벨라를 자신의 사촌 여동생인 것처럼 위장하여(이름도 벨라 벡스터라고 짓고) 보호하게 되는데, 벨라는 아치볼드와 약혼을 하긴 했지만 (구두상) 또 다른 구혼자인 웨더번과 함께 도피행각을 벌인다. 벨라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경험한 내용들을 고드윈에게 편지로 보내고, 벨라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웨더번은 정신이 점차 이상해져 그 역시 고드윈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낸다.


결국 벨라는 고드윈과 아치볼드에게도 돌아오지만 아치볼드와 결혼식 도중 벌어진 사건으로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다소 충격적인 결말로 치닿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아치볼드와 벨라는 결혼해서 그럭저럭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여기까지가 아치볼드가 쓴 책의 내용인데 이에 대해 빅토리아(벨라의 본명. 이름 자체가 대놓고 '빅토리아'다)는 다른 주장을 내세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분은 맞지만 (그에 대해서도 다소 잘못된 부분은 있지만),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부활하는 수술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아치볼드가 묘사한 고드윈의 모습이나 사건의 전말 역시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빅토리아는 사건의 개연성 측면에서 아치볼드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가를 독자에게 묻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빅토리아의 말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덫이기도 하다.


작품 내에서 여러 증거는 실제로 벨라가 죽은 시체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작품 내에서는 그것이 사실임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따라 독자의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작가의 의도는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SF라고 하기엔 뭔가 좀 어색하고 (만약 이런 작품을 테드 창이 썼다면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회풍자물, 호러물 혹은 시대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고딕 호러 같은 느낌도 가미되어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고전이 혼재된 모습도 보인다. <프랑켄슈타인>이나 <파우스트>에서 모티브를 따온 온 것도 있는 듯하고, <인형의 집>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아마 고전들을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겠다. 


어린아이와 같았던 벨라가 웨더번과 같이 도피 행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마치 '성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벨라가 세상에 대해 갖는 호기심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 벨라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경험들은 벨라가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도록 해주고 있다. 그 부분들이 좀 지루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뒤로 갈수록 외설적인 내용들도 부각되는데 이는 당시의 여성상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으며, 비록 기억 속에는 없지만 어쩌면 몸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억압의 기억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벨라는 그렇게 빨리 성에 집착하게 됐을까? 벨라의 그러한 성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서도 보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그러한 벨라의 행보와 각성을 통해 도덕성과 가치관에 대한 의문을 경계까지 밀어 놓는다. 


더 나아가 벨라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좀 더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여성상을 보여준다. 즉, 순종하는 아내로서의 삶이 아니라 본인도 의사가 되어 공동체와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이루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현실은 그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지만. 


이는 그 자체로 사회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전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회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어쩌면 그러한 도전을 하는 벨라의 모습 자체가 당시로서는 '괴물'로 보이지 않았을까?




난해하고 독특한 작품이긴 했지만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볼까 말까 고민 중인데 이 소설에서 묘사했던 시대상, 그리고 각 인물들을 영화에서 얼마나 잘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고 오스카상 네 개 부문에서 수상하자 책의 표지도 아래와 같이 바뀌었다. 영화의 홍보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영화 덕에 원작을 홍보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의 표지보다 좀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왜 바꿨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한아 <술과 바닐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