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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pr 11. 2024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

DALL-E로 생성한 이미지


나이가 들면서 '나만 옳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만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물론 타고난 성향이 있으니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그러한 것이 바뀌기는 쉽진 않으리라. 나도 그런 걸.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은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기에 일단은 자기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더 이상 방어하기 어려운 경우가 돼서야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나 어떤 신념을 평생 동안 지켜왔다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듯하여 더 필사적으로 방어하게 되고, 그러한 성향은 확증편향을 강화시키게 된다. 동일시의 오류. 우리 사회에 그러한 확증편향이 공고해진 건 그런 영향이 아닐까? 


그러한 확증편향은 지식수준이나 논리력, 사고력과는 무관한 것 같고, 학계에서는 오히려 고학력자가 그러한 확증편향에 더 쉽게 빠져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사고가 프레임에 갇혀있다 보니 생각의 자유도가 너무 낮아져 많은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 


또 다른 문제는 '틀렸다'의 기준이다. '틀리다'와 '다르다'는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그나마 요즘에는 이 둘을 구별해서 사용하자는 얘기도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틀리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기에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으며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 게다가 현대에서는 그 스펙트럼의 폭이 너무 넓을 뿐만 아니라 1차원적인 것도 아니기에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느 지점을 정해서 그것이 맞고 틀리다는 것을 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부분은 '논제'가 아니라 '논쟁'에 대한 것이다. 주로 원칙에 대한 문제와 방법론, 그리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아우른다.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그것이 타당한 근거가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라면 최선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어쩌면 그러한 과정에 계속 나의 판단이 개입되기에 역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론 나도 인정을 잘하지 않는다는 말도 듣기에 다소 억울한 면도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결국은 태도와 방법의 문제겠지.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돼야 할 것 같은데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들고, 배운 것이 많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데 아집이 너무나 끈적하게 달라붙어있기에 오늘도 반성하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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