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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y 27. 2024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심장마비를 겪고 두어 달 만에, 글을 놓아버린 뒤로 오십칠 년 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만을 위해 썼다. 그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말을 찾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나아가 맞는 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언젠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또한 단 한 글자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한 문장을 썼다.
...
때때로 나는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하나이며 똑같다고 믿었다. 책이 끝나면 나도 끝날 거라고, 큰바람이 방을 휩쓸어 원고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고, 허공에 펄럭이던 흰 종잇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방이 고요해질 거라고,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빌 거라고.


이 책을 두 번째 읽게 되었다. 처음에, 특히 앞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게 무슨 내용인가?' 싶었다. 내용 파악도 쉽지 않았고 흐름이 갑자기 끊어지기에 단편집인가 했지만, 이내 두 주인공(혹은 세 주인공)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주인공 간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 책에서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것은 제목과 동명인, <사랑의 역사>라는 가상의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를 더 해 간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언급은 그 책에 대한 간접적인 것뿐만 아니라 액자식 구조로서 직접 인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두 권의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한다. 


또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그 가상의 책을 통해서 전달되기도 하는 듯하다. 즉, 그 책은 또 다른 층이지이자 동시에 매개체, 연결고리 역할도 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혼동이 있었지만, 다시 읽을 때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유발하던 여러 장치들은 중반부쯤 가면 결말을 대략 예상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자칫하면 자신이 생각한 결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수준이 될 것 같지만, 다행히도 작가는 교차 편집(앞서 언급했던 두 명의 주인공 이외에도 그 주변 인물들,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장시켜)으로 독자의 생각을 흩트려 뜨린다.




그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내 집착은 막을 내렸다.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앨마를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에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벽을 세워 그런 생각을 차단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하나하나 그 벽을 이루는 돌이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음을 이해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벽은 또한 유년기의 고통스러운 생생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다


두 주인공 중에 한 명은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인 레오 거스키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로부터 탈출하여 미국으로 왔으며, 뉴욕에서 열쇠공으로 살아간다. 젊은 시절, 그는 앨마 메러민스키라는 여자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마음을 담아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썼지만 급하게 미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분실하게 된다. 그는 망각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외롭게 죽지 않기 위해 매일 누군가의 눈에 띄려고 노력한다. 특히나 심장이 좋지 않아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주인공은 앨마 싱어다. 이름에서 짐작할 있듯이 레오가 사랑했던 여자와 이름이 같다. 이는 앨마 싱어의 아버지가 우연히 <사랑의 역사>를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했으며, 그들 부부는 아이가 태어났을 소설의 주인공인 앨마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 부부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의 문화와 언어, 풍습 등이 작품의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러한 것은 작가인 니콜 크라우스 본인의 성장 배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항상 죽은 이들에게서 이름을 물려받는 걸까? 이름을 꼭 어딘가에서 받아야 한다면 좀 더 영원한 사물에서, 예를 들면 하늘이나 바다, 혹은 심지어 나쁜 것이라 해도 정말로 죽지는 않는 사상 같은 것에서 가져오면 안 되는 걸까?


앨마는 조숙한 특별한 아이였으며, 특별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예를 들면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 등. 그러면서 본인만의 생존법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 기록은 그 자신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이 작품 안에서 흐르는 '생존'의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소재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아빠의 부재로 인해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앨마는 아빠가 죽은 후 엄마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엄마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가족이 다시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번역가인 엄마가 <사랑의 역사>라는 (스페인어로 된)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번역을 의뢰한 제이컵 마커스라는 인물은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그 번역을 의뢰한 것이었다. 


앨마는 그 제이컵이 누구인지 궁금했으며, 그 번역일을 계기로 엄마와 제이컵 간에 어떤 로맨스가 펼쳐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앨마는 엄마가 번역한 내용을 통해 그 책에 대해, 그리고 책의 인물들을 찾아가는 추리를 한다. 그러다가 제이컵 머커스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의 정체는 레오와의 또 다른 접점이다. (다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엄마를 다시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찾는 일은 그로써 끝이 났다. 내가 무슨 일을 하건, 혹은 어떤 사람을 찾아내건, 나는 그는 우리 중 누구도-엄마가 간직한 아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 기억으로 엄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았다.




<사랑의 역사>가 레오가 분실한 원고가 출판된 책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출판이 된 것일까? 그것도 스페인어로? 그 부분은 스포가 될 수 있기에 (스포가 되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있지만) 다른 독자들에게 맡긴다. 앞서 주인공급이 한 명 더 있다는 얘기 역시 이와 연관하여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레오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평생 몇 권의 책을 썼지만 출판한 적은 없었다. 아니, 다른 이들을 통해 세상에 나왔거나 나올 예정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레오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삶 자체가 비참했지만 그러한 것을 거 강화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레오의 친구였던 브루노의 이야기라든가 그의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가족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앨마의 가족인 엄마와 동생 버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조연으로서 (심지어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조차도) 소설의 분위기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버드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으며, 스스로 '라메드보브닉'이라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만 거듭하던 버드는 마침내 자신이 라메드보브닉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다.


여담이지만, 레오와 앨마,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제목 위에 다른 기호를 통해 구분이 된다.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혼동이 좀 덜했을 것 같다. 그러한 사소한 장치를 발견하는 것도 독자의 몫일 것이다.




천사들은 어떻게 자는가. 선잠을 잔다. 그들은 인간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려고 잠결에도 뒤척인다. 그들은 안경을 새로 맞추고 갑자기 세상을 다시 봤을 때 느끼는 실망과 감사가 뒤섞인 기분을 알지 못한다. 
...
또한 그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부족하다. 거꾸로, 그들은 잠에서 깨어 서로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 기분이 무언가의 잔재인지 아니면 그들이 인간에게 느끼는 공감,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그들을 울리 는 공감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천사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꿈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렇게 두 진영으로 나뉜다. 심지어 천사들 사이에서도 분열의 슬픔은 존재한다.


그렇게 따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마침내 레오와 앨마의 만남으로 절정을 향해 간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를 찾아가던 중에 버드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그 약속 장소로 가게 된 것이지만. 


이 부분을 억지스럽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마지막 부분이야 말로 이 작품의 백미다. 이젠 더 이상의 구분 기호도 없이, 한 페이지씩 따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둘 간의 짧은 대화를 통해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 난다. 끝이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먹먹한 마음과 한편으로는 작품의 퍼즐이 맞춰지는 듯해서 이 책을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의 느낌은 역시나 처음보다는 덜했다. 이해는 더 잘 되었지만 전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전개되기에 다소 산만해 보일 수 있고, 내용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작가는 그러한 서정과 서사를 잘 풀어냈고, 여러 가지 영리한 기법을 통해 잘 버무려냈다. 




역자의 후기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 작품은 슬픔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랑 내에 내포된 다양한 감정 중에서도 슬픔과 고독이 주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제목인 '사랑의 역사'는 사랑에 수반되는 아픔과 상실의 역사를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유머와 위트가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며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슬픔의 역설을 보여주는 듯한데, 고통스러운 순간들 속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레오의 이야기에 공감을 느끼는데, 이는 그의 삶에 대한 연민을 넘어서, 그와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레오와 같은 인물이 있을 수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동일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작품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사랑과 상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어 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모두가 겪는 '사랑의 역사'를 구성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사랑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경험한 감정이나 사건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것을 극복하고 여전히 우리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은 과거의 그 역사가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증거이다.


앨마, 나는 말했다.
아이가 말했다. 네.
앨마, 나는 다시 말했다.
아이가 말했다. 네.
앨마, 나는 말했다.
아이가 나를 두 번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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