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존재들

멀찍이 거리를 두고도, 함께 숨 쉬는 생명들

by 슬로하라


여름빛이 물러나고 가을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이곳의 작은 생명들은 봄날 처음 다가왔던 몸짓처럼 다시금 눈앞에 겹쳐졌다. 불과 발끝 앞에서, 분주히 오가던 몸짓들이었다.


바위틈에 햇볕이 스며들던 봄날, 아직은 서늘한 풀잎 사이로 도마뱀들이 번개처럼 흘러갔다. 몸은 바위 위에 길게 붙여 햇빛을 받아내면서도, 그림자가 스치자마자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보기엔 다소 흉한 익충들의 움직임도 어디를 향한 건지, 낯선 외형과 빠른 움직임, 그러나 내 눈엔 그 재빠른 리듬마저 계절의 호흡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아마 이 땅의 생명들은 말 대신 몸짓으로 말을 거는지도 모른다.


풀밭과 돌틈에서 튀어 올랐다가 곧 숨어버리고, 흐린 날 아침,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건물 벽에는 제각각 크기의 달팽이 무리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물론 반가운 무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던 부류라 늘 피하고 싶었고, 가능하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까이 두고 싶진 않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만날 때는 한 번은 놀라 기척을 내다가도

이내 멀찍이서 바라보는 정도에 그쳤다.


사람보다 숲과 바위가 많은 풍경 속에서, 가끔 다섯 층 높이의 테라스에 기어오른 도마뱀을 마주치면 괜스레 반가울 때도 있었다. 먹이사슬의 생태계에 내가 누가 되지 않게, 조금은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그 생명들은 소란 없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살아간다. 바퀴벌레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 질서 속에서.


절반 가까운 땅은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고, 숲과 습지는 수십 년째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다. 보호된 풍경 속에서, 이곳의 생명들은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듯했다.


그래서일까, 멀찍이 두고 불편하게만 여겨지던 그것들이 이곳에서는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그 인식의 변화는 작은 순간들에서 더 뚜렷해졌다.


가끔은 창문 밖 처마 밑에 벌집이 매달렸지만, 여기 벌들은 한국의 말벌처럼 공격적이지 않았다.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나를 위협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들을 몰아낼 필요가 없었다.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굳이 싫은 기색을 내세울 이유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뭐라고 이 작은 생명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지켜 낸 질서 속에서, 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걸지도.



낮의 밝음이 서서히 물러나고, 어둠을 준비하는 시간, 새 계절의 문턱에서 그들 또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아직은 곁에서 보이는 존재들이고, 그 또한 바뀌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몸짓일 테다.


그저 그렇게, 작은 존재들과 함께 새로운 계절을 건너고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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