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익어가는 거리에서

탄내와 단내 사이, 계절이 구워지는 시간

by 슬로하라


이맘때 무렵부터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가 있다. 나무가 타는 탄내와 함께, 밤이 익어가는 달콤한 단내.


그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인파가 모인 작은 광장 앞, 오밀조밀 모여 선 노점들 사이에서 밤이 구워지고 있었다.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지는 따끈한 밤은 그리운 정취와 함께 손끝을 데운다. 어쩐지 지난겨울의 기억이 느리게 되살아났다.


이곳에서 처음 겨울을 맞이하던 이맘때쯤, 류블랴나의 프레셰렌 동상 근처 크리스마스 마켓 거리 한편에서도 나무 타는 냄새 사이로 군밤이 익어가는 내음과 달큼한 와인이 끓는 향이 뒤섞여 발길이 멈췄다.


반가운 마음이어서였을까. 두 이질적인 냄새가 한데 섞여 조화를 이루는 그 사이를 걷는 동안, 나는 한국의 겨울과 이곳의 겨울 사이, 두 계절의 경계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의 겨울도 늘 군밤 냄새로 기억됐다. 여느 겨울 간식이 많지만, 나는 유독 밤을 좋아했다.


검은 재 위에서 껍질이 터지며 구워지는 밤, 손끝에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와 입김과 함께 퍽퍽히 채우는 단단한 으깨짐은 어쩌면 추위보다 더 깊게 계절을 실감하게 했다.


그런데 낯선 유럽의 거리에서도 그 익숙한 냄새 덕에 졸여 있던 이방인의 마음이 단숨에 녹았다.


종이봉투 속에서 밤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은 따뜻했고, 손끝마다 재가 묻어났다.


언어와 풍경은 달라도, 손끝에 남긴 재의 흔적만큼 계절의 냄새도 같은 온도로 이어졌다.


계절이 구워지는 냄새로 채운, 그날의 거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리움의 계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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