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은인이고 중국은 가족입니다”

[대만 소소한 일상] 국민당 주석 발언에 SNS “가정폭력 극심” 냉소

by KHGXING

대만 제1 야당인 국민당의 정리원(鄭麗文) 주석이 지난주, 그러니까 1월 28일 “미국은 은인이고 중국은 가족입니다”라 발언해서 꽤 많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대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후시기에 나눈 미국과의 우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은인이라 표현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국 본토도 우리의 가족이기에 대만은 결코 우리 혈육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죠.


“대만은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만 해협, 양안의 화해가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와 협력으로도 이어지길 바랍니다.”라는 결론이네요.


대만도 사실상 양당제 국가죠. 제3당으로 민중당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의 국민당과 진보적인 성격의 민진당으로 정치권력은 나눠집니다. 국민당과 민진당을 보수-진보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친중-반중을 기준으로 성격을 구분하는 게 더 쉽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을 바라보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죠.


단적으로 거칠게 표현한다면 국민당은 친중 정당, 민진당은 반중 정당입니다. 국민당은 92공식(1992년 중국과 대만이 구두 합의한 내용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되 그 하나의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어디를 말하는지는 각자 해석에 맡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민진당은 이를 거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대만 독립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친중-반중이라 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친미-반미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국민당과 민진당 모두 친미 성향이죠. 다만 점차 대만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일반 국민 입장에선 아무래도 친중보다는 반중 정당이 보다 친미적일 것이라는 ‘해석’이 더해지긴 합니다.


이런 ‘해석’이 국민당의 고민에 맞닿아 있습니다. 정당이란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존립 목적입니다. 국민당으로선 유권자들의 이념지형이 중국에서 멀어지고 있는 마당에 중국 일변도 모습을 탈피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고민의 발단이 글 첫머리에 나왔던 ‘미국은 은인이고 중국은 가족’이란 표현이었던 셈이죠.


미국 성조기와 중국 오성홍기 사이의 대만 국민당 기


두 글로벌 세력을 잡으려는 국민당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국민당 미국사무소를 14년 만에 다시 개소했습니다. 국민당 미국사무소는 2008년 마잉주 국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둘 필요가 없어지면서 폐쇄했죠.


2016년 민진당 차이잉원 정권으로 권력이 넘어간 뒤에 다시 개소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다가 2022년 뒤늦게 개소한 겁니다. ‘국민당은 친미 정당이야!’ 라고 소리 높여 외친 셈입니다. 그 외침은 미국에 대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대만 국내로의 호소이기도 합니다.


반면 중국과의 끈도 놓지 않고 있습니다. 2월 3일에는 대만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국공포럼’이 베이징에서 열립니다. 2016년을 끝으로 이제껏 열리지 않던 국공포럼은 9년만에 양 정당 싱크탱크포럼 형태로 개최됩니다. ‘양안 교류 협력의 미래’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포럼은 국민당에서 샤오쉬첸 부주석이 대표로 참가하네요. 대만 당국은 “정치적 성격의 협의를 진행해선 안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물론 주석이 누구냐에 따라 국민당 방향성이 크게 바뀌진 않겠지만 지난해 11월 선출된 정리원 주석의 성향도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 지속해서 친화적인 메시지를 발신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 주석은 꽤 ‘꿋꿋합니다.’ 당밖은 물론 당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는데도 이전 주리룬 주석보다도 국민당의 친중 성격을 그대로 표출합니다. 중국 본토 방문 가능성에 대해선 “당연히 가야 한다”고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했고요. “앞으로 모든 대만인들은 당당하고 자랑스레 ‘나는 중국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대만 국민의 62%는 이 발언에 반대했지요.


이번 ‘미국은 은인, 중국은 가족’ 발언에 대해서도 대만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거칩니다. 대만의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PTT는 물론이고 각종 SNS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수백개의 토론글들이 도배되고 있네요.


비교적 순화된 비판을 예로 든다면 이렇습니다. “심각한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족”, “친척이 저한테 미사일을 겨누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가족과 친척이 더 무서운 경우가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데!”, “그런 친척이 있다면 진작 혈연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국민당은 자기 친척들에게 대만으로 쫓겨났으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포위한 것은 그럼 대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나?” 등입니다. 비교적 온순한 글들이 이 정도네요.


최근 숙청당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위원회 부주석 장여우샤(張又俠)를 빗댄 냉소도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은데 숙청당했어요...” “장여우샤 왈, ‘우리는 형제자매 같아요. 그런데...’” 알려진대로 중국 군부 2인자 장여우샤는 시진핑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죠. 두 사람의 아버지가 중국 공산당 혁명 시기 동지였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을 거라는 전제 하에 그런 가족과 같은 사람도 숙청하는 현실에서 무슨 가족 타령이냐는 힐난입니다.


PTT나 SNS는 아무래도 젊은 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공간입니다. 국민당에 더욱 반감이 강한 세대라 할 수 있죠. 그러니 정리원 주석의 ‘은인, 가족’ 운운에 비난의 글들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국민당으로서는 이는 뼈아픈 현실입니다. 그동안 ‘늙은 정당’ 취급받던 국민당은 ‘젊은 정당’으로 탈바꿈하려 꽤나 노력해 왔거든요. 수년전부터 청년당원 가입을 독려했습니다. 그 결과 당원 가운데 60세 이상이 70%를 상회하던 수준에서 40세 미만이 40% 이상을 차지하는 연령구조로 바뀌었습니다.


2020년에 당 주석으로 48세 3선 입법위원을 선출했는데 그 이후 이러한 변화가 본격화했죠. KMT 스튜디오와 같은 소통 플랫폼도 만들면서 디지털화도 강화했고 35세 미만 신인 정치인에게는 공천과정에서 100% 가중치를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단시일내에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힘든 모양입니다. 이번 정리원 주석 발언의 댓글을 보면서 든 느낌입니다.


하여간 정 주석의 발언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하고 합리적인 방향 설정이겠지요. 약육강식의 논리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어느 한 강대국에 자국의 안보와 경제를 모두 내맡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바보같은 건가요. 그런 차원에서 양강 세력을 모두 보듬겠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다만 국민당의 그간 역사적인 맥락을 아는 국민들로서는 그게 곧이곧대로 해석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늘날 대만 정치의 한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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