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소소한' 일상]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을까요. 어처구니없습니다. 피해도 피해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제 자신에게요.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꽤 오래된 피아노죠. 대만에 이사 오면서도 가지고 왔습니다. 초등학생 때 아이가 이용했지만 지금은 거의 치지 않습니다. 와이프가 결단을 내렸어요. 중고 거래로 팔기로.
한국에서는 당근 거래가 일반적이죠. 물론 이런 피아노는 공짜로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운송비용을 얹어 줘야지만 처분이 가능합니다.
대만에서는 가능할까 싶어 페이스북 ‘Marketplace’에 올렸습니다. 와이프는 대만에 와서 페이스북을 통해 여러 차례 중고 물품을 거래했습니다. 자전거도 NTD1,000(한화 약 4만3천원)에 팔았고 중고책이나 빈백도 솔깃한 가격에 구매하겠다는 상대를 찾아 넘겼습니다.
이번에는 피아노였죠. NTD5,000(한화 약 21만원)에 내놨습니다. 연락이 올까 싶었습니다.
토요일 주말에 연락이 왔습니다. 3명에게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중 제일 먼저 연락을 한 사람과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페이스북 상 공개한 정보를 보니 대만 남부 타이난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았죠. 제값 받고 거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물어보니 혹시 본인이 직접 가지 않고 물류 회사를 보내서 받아오도록 해도 되냐고 하네요. 당연히 가능하다 했습니다.
돈은 어떻게 보낼 것이냐 물어보니 물류 회사에 돈을 보내놓고 그 물류회사가 우리에게 송금해 준다 합니다. 대만에는 그런 서비스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품 배송 URL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URL 아래 사진도 그럴 듯합니다. KERRY 물류회사 사진입니다. 그 사이트에 우리집 주소와 돈을 받을 은행 계좌번호를 입력해 달라고 합니다.
열어보니 KERRY(嘉里大榮)이란 물류 회사의 운송장 사이트였습니다. ‘물건 받는 사람’으로 페이스북 통해 우리에게 연락을 준 사람 정보(물품종류, 받는 사람, 금액, 연락처, 주소)가 적혀 있었고 ‘물건 보내는 사람’ 정보는 공란이었습니다. 그 공란에 우리 정보를 입력해 달라는 것이었죠. 화물대금 NTD5,000은 이미 KERRY측에 입금이 돼 있고 금액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대만에는 이렇게 물류회사 통해서 물품과 돈을 받을 수 있구나 생각에 별 의심 없이 정보(보내는 사람, 주소, 연락처, 은행 계좌번호)를 입력했습니다. 정보를 다 입력하고 나서 보내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오류가 발생해서 접수가 되지 않네요.
페이스북 거래자에게 연락을 했죠. 정보 전송이 안 된다고.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혹시 처음 KERRY 이용하는 거냐고. 그렇다 했지요. 그러면 아마 KERRY쪽에 등록을 해야 한다고 하네요. 자기가 보내준 그 사이트에 있는 KERRY 고객서비스센터 눌러서 연결하면 KERRY 담당자 LINE으로 연결될 거라면서 그곳을 통해 인증을 하면 된다고 하네요.
서둘러 달라고 하더군요. 오후 3시쯤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6시 이전에 예약이 되어야 다음날 방문해서 화물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결된 LINE 상대자가 ‘嘉里大榮物流 kerry TJ’로 기억합니다. 대만에서는 LINE이 우리나라의 카카오톡과 같은 것입니다. KERRY(嘉里大榮) 공식 계정이었습니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럴 듯했습니다. 일반적인 기업들의 LINE 공식계정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정말 KERRY(嘉里大榮)은 대만의 3대 물류 기업이더군요. B2B, B2C 물류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고요. 다만 그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메인 화면에 팝업으로 먼저 이러한 문구가 떠오릅니다. 한마디로 ‘사기 주의’란 공지문입니다. 공식 웹사이트 이외 플랫폼에서 화물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네요.)
이제 그 ‘嘉里大榮物流 kerry TJ’와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KERRY 물류 온라인 고객서비스센터라면서 정보 확인을 위해서 성명과 수령금액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알려줬죠.
조회해본 결과 제가 KERRY 물류의 운송약관 약정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네요. 그러다 보니 제 계좌번호 연결이 되지 않아 제 계좌로 페이스북 상 보내는 사람이 송금한 금액 이체가 안 되고 또 그러다 보니 invoice 작성 완료가 되지 않았다 합니다. 결과적으로 온라인 금액수령기능을 오픈하기 위해 운송약관 약정에 서명을 해달라는 거지요.
약정 서명은 개인 정보 보안을 위해 KERRY 사이트상에서 직접 하지 않고 고객 주거래 금융기관에 위임하여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주거래 은행명과 계좌번호 앞 숫자 4개를 입력해 달라 합니다.(전체 계좌번호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요) 입력했습니다.
처리중이라며 “지금 화면을 종료하지 말아 주세요”란 안내문구가 뜹니다. 그러곤 금융기관 전담직원에게 접수 요청을 마무리했다며 또다른 URL을 하나 보내줍니다. LINE URL인데 클릭하면 전담직원이 친구추가가 되고 그 직원이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 직원 통해서 금융기관에 위임하여 약정 서명이 진행된다는 것인데, 이 프로세스만 마무리되면 KERRY에 송금돼 있는 금액 이체가 가능해진다는 부연설명을 더합니다.
그런데 그 전담직원 LINE 추가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와이프는 핸드폰 상에서 LINE 추가를 엄격하게 하도록 조건을 걸어둔 모양입니다. (아 이 모든 프로세스가 와이프 핸드폰 상에서 제가 하고 있던 겁니다) LINE ID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ID로도 친구추가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QR코드 친구추가 기능을 이용해 연결됐습니다.
전담직원 LINE 이름은 ‘서명인증’이었습니다. 우선 제게 KERRY측 송장에 적어놓은 정보가 정확한지 보내왔습니다. 물품 수령자 성명, 물품 금액, 보내는 사람 성명, 연락처, 은행명칭, 현재 문제점, 계좌번호, 주소. 모두 정확했습니다.
그러곤 LINE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3번 정도 전화가 왔지만 받질 못했네요. 실은 저녁 외식을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식당에 도착할 때쯤 핸드폰을 확인하니 전화가 와 있네요. 제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연결이 됐습니다.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네요. 핸드폰 상에 제 은행 app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있다 하니 우선 연결하랍니다. 통화는 와이프 전화로 하고 있지만 제 핸드폰에 제 은행 app가 있기에 통화하면서 수월하게 앱을 열 수 있었습니다. 빨리 마무리하고 밥 먹으러 가겠다는 ‘일념’에 서둘렀죠.
우선 제 계좌의 가용금액이 얼마인지 확인해 달라고 합니다. 왜 그걸 확인하지? 하면서도 크게 의심하진 않았습니다. 절차인가 보다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처음 시작되어서 KERRY 담당자와 LINE 상에서 실랑이를 했고 이제 또 인증 절차로 금융기관과 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귀찮고 지난해서 빨리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녁 먹기 전 어두컴컴한 길에서 차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고 평소 사용하지 않는 중국어 금융 관련 단어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내 참 NTD5,000원 벌기 어렵네, 와이프 기다릴텐데 빨리 끝내야지 싶어 절차를 서둘러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3단계를 해야 한다고 하네요. 1단계는 우선 자기가 불러주는 계좌로 7이라는 금액 입력해서 보내라 합니다. 계좌이체는 실패할 것이고 그 실패한 내역을 캡쳐해서 LINE 방에 보내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계좌가 내 것인지를 확인하고 확인되면 KERRY 인증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합니다. 정말 계좌이체는 실패했습니다.
이제 2단계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불러주는 계좌로 마찬가지로 송금하고 실패가 뜨면 다시 캡쳐해서 보내라네요. 송금 숫자는 049985였습니다. 다만 금액란이기에 앞에 0은 입력이 안된다 하니 괜찮다고 그렇게 해서 계좌이체 클릭하라네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계좌이체 실패가 아니라 성공했습니다. 이게 머지?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왜 계좌이체가 성공하냐고 따졌습니다. 어차피 세 번째 마지막으로 하고 나면 다시 환입할 것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니네 믿지 못하겠다, 우선 지금 계좌이체 성공한 것부터 바로 지금 내게 다시 송금하라고 항의했습니다. 세 번째까지 절차가 마무리되어야 다시 환입할 수 있다고 세 번째까지 마무리하자고 합니다.
계속 항의하니 그 LINE 방에 자기들 상사라는 사람을 초대해서 응대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 그 방에 이미 저 포함해서 3명이 있었습니다. 2명이 아니고요. 그러다 보니 그 방에 4명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마지막 절차 남았는데 지금 마무리 되지 않으면 환입도 안되고 KERRY에 들어와 있는 피아노금액 NTD5,000도 입금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이상했지만 지금 멈출 순 없을 것 같아 세 번째 계좌이체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송금액에는 049986을 입력하라 했고 0은 입력이 안되어 49986만 입력했습니다. 이것은 다행히 송금 실패가 떴습니다. 그런데 보니 송금이 실패한 이유는 1일 이체한도가 NTD100,000인데 오전에 제가 다른 일로 이미 NTD50,000을 송금했었기 때문입니다. 송금 실패가 되니 오히려 그쪽이 당황해 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복기해 보니 너무나 명확하긴 합니다. 처음에 계좌 실패를 하도록 해서 제가 의심하지 않도록 한 것이고 금액란에 0을 붙여 입력하라고 해서 금액 입력이 아닌 것처럼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뭘 복기까지 하고 나서야 알게 됐냐고 말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에서야 절감합니다. 순간순간 말도 안 되는 요구였는데 그때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따라하고 있었네요. 먼 자랑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겠습니까만 복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사기가 아니겠지란 ‘믿고 싶음’에 계속 따라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지금 바로 송금 성공한 금액 환입하라고 경고했지만 그게 먹힐 리 없습니다. 더 이상 통화할 필요가 없어서 우선 통화를 끊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기다리고 있던 와이프와 만났고 바로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찾을 리 만무할 것 같긴 하지만 일단 그래도 경찰서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고요.
담당 경찰관은 우선 보이스 피싱 전용 신고전화 165에 신고를 하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러곤 두 시간여에 걸쳐 조서를 꾸몄습니다. 페이스북과 LINE 방에서의 대화 화면도 일일이 모두 캡쳐 해서 증빙 자료로 제출했습니다. 경찰관들은 친절했습니다.
요즘 대만에서도 이러한 보이스 피싱이 꽤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조서를 꾸미던 와중에 또다른 피해자들이 온 것 같습니다. 경찰관이 얘기하길, 저희는 그나마 그래도 다행이라네요. 지금 들어온 사람들은 2천만 대만달러 사기 피해를 당했다네요. 우리돈 8억6천만원에 해당합니다.
조서 작성이 끝나고 접수가 되자 문자로 접수 번호가 왔습니다. 차후 법원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 합니다. 법정에 와서 다시 증언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감사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대만 경찰서에 갈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이렇게 가게 됐습니다.
하여간 한국에서도 당하지 않던 보이스 피싱을 대만에서 당했습니다. 아니 대만이기에 당했나 봅니다. 어리숙한 외국인이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었겠습니까. 경찰서 나오는 길에 그제서야 뒤늦게 보이네요. 보이스 피싱 사기 방지 포스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