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필리핀 튜터들과의 수업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수다 떨기가 대부분이었다.
서로의 다른 점과 같은 점, 공통사를 말하다 보면 한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한국 남자랑 결혼 안 할 거야!
한국은 가족 때문에 여자가 힘들다면서?"
젊고 앙증맞은 선생님과 국제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이 많아서 한국의 시댁 문화를 튜터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댁에 가면 여자들은 식사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남자들은 쉬고 있다는 게 진짜야??"
"응, 명절에 시댁에 가면 나는 인사하면서 부엌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부엌 밖에 앉아 있어."
시댁에 가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당연한 듯이 부엌으로 직행했었다. 이미 부엌은 여자 식구들로 가득했고 나도 늦게 와서 미안한 척을 살짝 비치며 한자리를 차지하고 음식 준비를 도왔다.
남편은 본인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아이들과 티브이를 보고 있고 제사를 지내고 상이 차려진 후 남자들 먼저 음식이 잘 차려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아침 식사를 할 때 뒤늦게 상차림을 끝내고 아이들 위주의 반찬이 소량 있는 상에서 아이들을 먹이며 쪼그리고 앉아 대충 식사를 한 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그릇을 설거지 통으로 배달을 해주고 나는 어느새 설거지통 앞에 고무장갑을 낀 채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시어머니는 옷에 물이 튀긴다며 앞치마를 살뜰히 챙겨 주신다. 설거지를 끝내고 잠깐 앉으려고 하니 다과를 차려야겠다고 하신다. 감사하게도 시집온 첫째 명절에 과일을 쥐 파먹은 듯이 깎는 나를 보고 나에게 더 이상 과일 깎으라는 말은 하지 않으신다. 나는 과일을 잘 못 깎는 덕분에 커피를 탄다. 어느 날은 커피를 안 타고 있으니 나보고 커피를 어르신들에게 배달을 하라고 한다.
결혼을 한 몇 년 뒤 내 밑에 동서가 들어왔다. 그 동서의 첫 명절에 작은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제 며느리가 다 들어왔으니 제사는 며느리들에게 물려주면 되겠다고 말을 하신다.
'저는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은데요? 제 조상님도 아닌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남편을 보며 썩소를 지으며 눈으로 레이저 한번 쏴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 설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서와 사전 모의를 거쳐 남편과 남편 동생에게 설거지를 시켰다. 우리가 가고 난 뒤 항상 가시던 시 외갓집을 체해서 못 가셨다는 시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난 남편에게 "자기 설거지 시켰다고 어머니 체하셨어?"라고 했더니 그냥 우연히 체하신 거라고 자기 엄마 편을 든다.
그다음 명절이 아닌 가족 모임 때 식사 후 설거지를 시할머니가 하신다고 하셨다. 갑자기 친척 형님이 나서서 " 할머니가 설거지했다고 하면 온 동네가 비웃어요! 그런 일 있으면 텔레비전에 나오겠네!!" 하면서 우리를 쳐다봤다. 난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아이가 없는 동서가 형님과 눈이 마주쳐서 설거지통 앞에 섰다.
이 이야기를 튜터에게 하면서 그래도 우리 시댁은 양호한 편이라고 나는 당일치기밖에 안 한다고 말을 하니 튜터는 필리핀과는 너무 다르다며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내 남편 그렇게 안 봤는데 나빴다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필리핀의 가족모임은 어떠냐는 말에 대부부의 필리핀 가족은 일요일마다 모인다고 했다. 아직도 대가족이 가까이 모여사는 문화이고 친척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한국과 다른 점은 가족들이 모이면 할머니가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고 조그마한 아이들을 봐주며 가족들끼리 이야기하고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네 가족들은 할머니를 사랑하고 고마워하며 존경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힘든 일이 있거나 쉬고 싶으면 할머니 집을 수시로 찾아간다고 했다.
"그럼 할머니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어? 힘드실 텐데?"라고 물어보니 가족들이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는데 한국처럼 여자만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닌 남녀 모두 하고 싶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한국의 가족관계가 망가지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한국의 가족은 나이가 많으면 일을 안 하면서 존중받아야 하고 나이가 어리면 눈치를 보며 일을 해야 한다. 이게 가족인가? 사회인가? 나이가 많을수록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게 자신의 권위를 높인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대접해 주고 싶은 젊은이들은 없다.
"시 어머니가 음식 장만을 다 했으면 며느리가 설거지라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
라는 물음에 대부분 맞벌이 가정일 텐데 사위는 처가 갔을 때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안 하는데 왜 며느리만 해야 하냐고 질문하고 싶다.
아마 유교적인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의 가족 붕괴는 계속될 것이다.
필리핀처럼 할머니가 맛난 걸 해주고 설거지도 하시면 가고 싶은 시댁이 될까??
요새 절실히 느끼는 부분이 위에서 아래로 사랑이 가야 밑에서 위로 존경이 간다는 것이다.
한국에 온 후, 지난 가족모임에서 시어머니께 필리핀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며
"저는 남이에요. 어머니가 사랑을 주며 키운 아들이 아니라 아들 친구예요, 그럼 어머니께서 먼저 사랑을 주셔야지 존중이 가지 않을까요?"라고 말씀드렸다. 그 후 어머니가 자꾸 내 전화를 짧게 하며 피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의 착각이겠지….
마지막으로 16세기에 살았던 나와 생각이 비슷한 몽테뉴의 책『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글로 마무리한다.
《자식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
경제적 도움을 주는 대가로 밖에 자식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그는 참 가련한 아버지이다. 그런 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능력으로 존경을 받아야 하고, 착한 마음과 온화한 태도로 사랑을 받아야 한다. 재료가 풍부하면 타고난 재도 가치가 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인물들의 유해와 유물에까지도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인생의 원숙기에 존경받던 인물은 노년이 되어 아무리 늙고 비루해져도 자식 등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일이 없다. 그들의 심성이 의무를 다하도록 자식들을 교육한 것이지, 욕구와 필요에 못 이겨 또는 강제와 억압으로 존경하게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