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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Jun 25. 2016

머리 염색해 주는 남편

자신보다 어린 아내의 흰 머리카락을 염색해 주는 시간


지금]

북쪽으로 난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고요한 마음으로 그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두 가지 재료를 섞어 단숨에 내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발라준 뒤 시간에

맞춰 머리를 감으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때]

한 달 동안의 업무 인수인계가 끝나고, 회사를 떠나던 날! 집 대문까지는 왔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뒷좌석에 드러누웠다. 도무지 차에서 한 발자국도 땅 위로 내디딜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운전수가 급하게 집에서 내온 물 한잔을 마시고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퇴직하던 그날까지 염색을 한 적이 없었다. 한데 한순간  반백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 백발이 된 노인 이야기는 전설에나 있는  알았는데, 내게 그 엇비슷한 일이 어난 것이다. 나 자신이 원었고, 인수인계도 성공적이었고, 이틀 후면 한국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갖고 공항으로 나가 완전히 떠날 것이어서 마음은 자유로웠으나, 머리카락은 나의 속내가 올라온 것인지 하얗게 되어버렸다.


 돌아온 나의 머리카락을  보고 시어머니는 놀라셨다. 그 후로 검은 머리가 났는지 지속적인 염색으로 흰 머리카락이 검게 된 것인지 여전히 긴 생머리로 지낼 수 있게 된 건 남편 덕분이다. 미장원 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위해 둘째가 처음으로 집에서 염색을 해주었다. 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연륜을 더 하는 것 같아 좋아 보였으나 나의 모습은 여간 당황스럽지가 않다.


 아이들과 '서로 독립'을 선언한 후에는 뭐든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했다. 나에겐 남편 J 있어 팀플레이를 하기에 괜찮은 조건이다. 우리 가족 서울과 전원으로 나눠 살기를 결정한 후 서울에서의 마지막 염색 날 J는 꼼꼼히 둘째가 엄마에게 해 주던 염색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후

 동안 그는 수시로 내 머리칼을 살피며 염색해주고 있다. 19살 적 친구로 만난 한 살 어린 아내의 흰색 머리카락을 염색해 줄 만큼의 시간 흘렀다는 게 그에겐 어떤 의미일지?


 아직 그의 머리카락은 염색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 그는 염색하는 일 따윈 아예 시작 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가 주문한 것이 택배로 배달되었다. 염색 후 잘 스며들라고 머리에 쓰는 비닐 켑이었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2주에 한 번씩 염색을 한다고 치면 일 년에 24개.... 이 켑을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주문할 필요가 없게 될까? 세월의 자연스러운  흔적을 언제쯤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는 살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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