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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Sep 12. 2016

안갯속에서

고요


"안개가 자욱해!"

구월이 되면서부터 이른 아침엔 지척을 제외한

마을온통 안개로 둘러싸여 있다.

커피 한잔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  저 건너편도 보이지가 않아."

"지금부터 이곳에서 안개로 둘러싸인 아침을 

맞겠네!"



이곳에 터를 잡은 뒤 20대에 읽고 지금껏 마음에

남아있는 '시가 풍경으로 피어는 장면'을

것은 두 번째다. 겨울 눈 내리던 풍경을 보며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중 '즐거운

편지'가 떠올랐고, 홀로 산책 중인 지금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갯속에서' 눈 앞에서 펼쳐지고

다.


안갯속을 거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저마다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인생이 아직 밝던 때는 세상은 친구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안개 내리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어쩌지도 못하게 슬그머니 떼어 놓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진정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안갯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하다 산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다

                Herman Hesse    안갯속에서


가까이 다가가면 두리번거리게 되는 향기를  

흩어놓 분홍 달맞이 꽃은 오월부터 쉼 없이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이 진 자리에서  씨앗

찾지 못한  궁금증을 오늘은 풀어볼 요량이다.

돌에 앉아 천천히 줄기 따라가며 더듬어보니

작은 씨앗 주머니가 부스러진 멸치 조각처럼 

붙어있다. 야생 달맞이 꽃 지고 난 자리에

매달린 투실한 씨앗 방들과는 대조적이다.


노랑과 흰색 국화 너머에도 안개는 그대로다.

풍접초(족두리 꽃)는 최근에 내린 비로 제철을

만나 다시 피어나고 있다. 어릴 적 이 꽃은 내게

키만 삐죽하고 꽃은 아름답지 않으며 행색이

초라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그림을 탁월하게 그려내던 난희 씨의 그림 속

족두리꽃을 보고는  단박에 사랑하게 되었다. 



마을 초입의 주유소 주인이 준 빈카 꽃씨정원

곳곳에서 화사함을 전해주며 온갖 종류의 나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다. 을 살피는 사이

순식간에 안개가 물러나고 있다. 안개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은빛이다. 7월에 채종한 후

가지 걷이를 미룬 채 그대로 두었던 백일홍은 

서늘해진 날씨에 다시 피어나 화사한 색발산 

중이다.



진분홍인 분꽃은 하나의 통꽃으로 아침과 해

거름 녘 두 번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데 참!

부지런하다. 잘 익은 까만 콩만 한 씨앗들은

오돌토돌한데 어린 시절 나는 그 씨앗들을

돌멩이 위에 올려서 또 다른 돌멩이로 깬 뒤

하얀 분말이 가득한 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씨앗 속에 떡잎을 감추고 있던 감과는 달랐던 게

이상했었다. 울타리 쪽은 기댈 수 있어 그런지

꽃들은 나무처럼 키를  키우고, 마사토에선

중키로, 기댈 나무도 방해물도 없는 키 낮은

허브  자리에서는 작은 키로 여유롭게 자라

는 꽃의 자율이 좋다.



꽂꽂한 자세이던 루드베키아는 중심 꽃대를 

잘라 가지를 늘렸더니  크기는 작아지고 오종종

피어난 것이 노란 국화 무더기 같다. 저만치에

스테이크 접시만 한 황촉규와 깨끗한 광목천

같은 다투라도 끝없이 봉오리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우고는 가을볕에 씨앗이 영글어가고 있다. 

지나친 관심이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우리 집 식구들과 닮은꼴이다.



아기사과와 토종 대추 열매가 올해는 실하다.

새들과 다람쥐는 이 아침에도 달콤하게 익은

열매들을 먹느라 나뭇가지 속에서 뒤쫓거나 

할퀴며 시끄럽게 싸운다. 맛있게 익은 배와 

블루베리는 새들의 몫이 되어 한 알도 건지지

못했다.



지난 4월- 서울에서 돌아온 늦은 밤 대문에

누군가 묶어둔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정체불명의

 구근은 심어놓으니 몇 달째 연보라 달리아를

 피우고 있다.

"-누구였을까?"

모호한 것들도 많고 분명한 것들도 많은 동네다.



맨드라미 꽃은 이미 전으로 부쳐먹기도 했고 

증편 고명으로도 시도를 해보았다. 씨앗이

맺히는 부분은 두고 위쪽의 레이스 부분만 잘라

꽃차로 만들어두면 좋은데. 구월부터는 나는

하루 종일 마실 티를  아침에 만들어 두고 있다.

빛깔은 아름다우나 맛이 심심한 맨드라미 차

에는 몇 알의 카모마일을 섞으 환상적인 궁합!




20대엔 염세적이었고, 몹시 아팠던 나의 정신과

건강이 자연 속에서 훨씬 나아진 지금의 나는

- 시에서 느끼는 감흥도, 세상을 보는 시각도,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자세도,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도 적잖게 달라졌다. 인생에 아무리 안개가

자욱해도 걷혀버리는 걸 알기 때문만은 아닐 것

이다. 시간이 해결해준 것도 있을 테고, 사람과

부대낌에서 알게 된 것들도 적지 않았고,

부심하며 일했던 고됨 속에서 얻은 깨달음도

있었겠지?

고요한 안갯속 산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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