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희 Nov 24. 2017

눈 내린 아침 걷다 돌아오니

김치 굴국밥과 매생이 계란말이


 누군가 내가 잠자던 밤에 다녀갔나 보다. 눈 위의 발자국으로 보아 새 인지 들고양이 인지 구분이 되지 는다. 북풍을 피해 데크 한편으로 올라와 쉬었든 게 틀림없다. 이른 서리로 인하여, 초록인 채로 하룻밤 만에 다 떨어졌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샛노란 잎과 열매를 넉넉히 보여준 은행나무 부부가 사이좋게 서 있다.



 작은 나뭇가지에 엄청나게 피웠던 꽃의 무게로 힘겨워하던 목수국은, 물 내린 가지와 떨군 잎 마른 꽃으로 인해 가볍게 지내더니 오늘은  솜사탕 모자를 썼다. 단풍이 꽃 보다 아름답던 화살나무에 성냥 같은 빨강 씨앗들이 조롱조롱 매달였다. 



  친정 엄마를 그리며 마련한 장독대엔 댓 개의 뚝배기가 더해져 오종종하다. 키친가든 위로도 하얀 눈 이불이 덮였다. 눈 아래엔 아직 수확하지 못한 우엉과 내년 봄에 먹을  상추와 방풍나물, 허브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미처 걷어내지 못한 산국과 맨드라미 찔레 열매에는 핫도그 반죽 같은 눈이 뭉쳐져 있고, 새 봄에는 주변을 질경이 밭으로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 질경이 씨앗들이 눈 위로 드러나있다. 산초열매로 기름을 내어 두부를 부쳐먹는다는 이곳 식문화에 관심이 많다. 국자처럼 눈을 받치고 있는 열매산초나무다. 한여름 일을 하다 쉬어가던 느티나무그늘을 드리우던 잎이 모두 떨어져 윤곽이 뚜렷해졌다.



 나무 하나만 잘 그려도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산수유, 대추나무, 밤나무, 신나무, 감나무! 막상 그림으로 표현해 보려면 가지와 둥치가 참으로 제각각이라 쉽지 않다. 모든

나뭇가지를 죽죽 뻗은 대나무처럼 그리는 내게 붓대 끝을  힘주어 잡고, 가지의 기운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손대면 톡톡 부러질듯한 감나무 가지를 그려내던 YJ의 솜씨가 눈에 선하다.



 산에서 집 쪽으로 내려온 발자국도 보인다. 어떤 산짐승일까? 흔적으로 보아 서두르지 않는 뿔 없는 사슴- 고라니 같다. 고흐의 그림 중 화폭 전체를 차지한 [꽃이 핀 복숭아나무] 와언제 봐도 닮은 아카시아! 가을걷이를 않고

그대로 둔 백일홍에도 눈꽃이 피어났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고,
정리정돈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Simple Life를 추구하며, 비우기, 내려놓기
가 일상의 화두가 되어버린 현재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지고 난 꽃을 말끔히 정리하면 풍경에서 오는 이런 안온함은 없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은 것도 많다.


 

 꺾어 도는 길 건너편에 팽나무가 자란다. 벚꽃보다 선명한 분홍꽃을 피우는 복숭아나무와 팽나무 몸체는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눈 내린 밤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 싶다. 누가 심었던 나무들이 아니다. 우뢰와 천둥소리를 내며 바윗돌이 구르던 계곡엔 장마가 그치던 날 그대로 멈춘 바위와 작은 돌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참새들은 저 마른 갈대 속에서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암석정원 사이에 심긴 꽃과 식물 뿌리는 눈이 녹으면 좋을 것이다. 가을 가뭄이 참으로 길었던 해였다. 다람쥐들도 다 제 겨울 집으로 갔으니 서리가 여러 날 내렸고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 지금부터 나도 집 안에서 겨울을 날것이다. 오랜만에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요리도 하고 놀러 오는 사람들과 진한 수다를 떨 것이다. 겨울잠 대신하고 싶은 거리들이 적지 않다.


  

 깊고 그윽한 향기를 주는 모과나무, 동네 벌은 다 모아 들이는 밤과 아카시아 나무, 아직도 초록잎을  매단 보리수나무, 단풍이 아름다운 신나무와 아기단풍 나무, 수십 그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편백나무, 맛난 가죽나무와 오가피 그리고 두릅나무, 겨울 옷을 입은 배롱나무,,,,  아기사과나무 벚나무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오니 식어 버린 커피가 놓여있다. 커피 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밖에서 걷기만 했었다. 고즈넉한 마을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는 그대로 두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굴과 김치와 김칫국물 두부를 듬뿍 넣어 끓인'김치 굴국밥'은 눈 내린 날 아침식사로 제격이다. 사발에 푸기 전에 참기름과 김가루를 뿌린 들 누가 뭐라고 할까? 매생이 계란말이는 산촌 겨울나기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식사가 끝나면 계란 껍데기와 커피가루에 물을 부어 한번 저어둔다. 우러난 물은 실내에 들여놓은 화분에 부어준 뒤 찌꺼기는 정원에

뿌린다. 부러 화분의 거름을 사지 않아도 이렇게 해두면 꽃 색이 예뻐지고 식물은 건강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식탁 위의 미니 정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