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했던 여름을 추억하며
초등 1,2학년을 키우고 있는 후배와 식사를 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안함이 우선순위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옷차림, 잠이 부족해 푸석한 피부, 지친 표정. 생생한 유년기를 함께 아이와 뛰어놀며 함께 보내던 젊은 엄마는 어느 덧 40대에 접어들어 나날이 체력이 떨어져간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신경쓸 일도 많고 챙길 것도 많고 아이의 넘치는 욕구-놀이, 여행, 식욕, 친구 등등-와 엄마의 손길도 비례해서 커지는 시기이다. 육아에만 전념해도 쉽지 않은데, 워킹맘이라면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저 시기에 어땠나. 복직 후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던 시기였다. 야근도 잦았고 주말에도 출근했었다. 나는 3년만에 돌아온 직장에서 참 잘하고 싶었다. 휴직기간 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거였을까. 아이는 다행히 돌봄 이모님과 아빠와 잘 지내고 엄마가 늦는 것에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물어봤다.
- 아들, 엄마가 너 초등 1,2학년 때 매일 늦었는데 그 때 서운하지 않았어?
- 보고 싶었지만 참았어. 엄마가 늦게 오고 바쁜 거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제는 내가 아이를 기다린다. 공부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기다리고, 간식은 무엇을 준비할까 마음이 부산하다. 정작 아이는 엄마보다 저 멀리 자기 세계의 지평을 넓혀가며 새로운 걸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 엄마 이거 알아?
-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 엄마, xx 이는 나랑 의견이 달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춘기 남학생의 머리 속은 분주하기 짝이 없다. 두뇌가동률이 높아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그런지 언제나 몸엔 열이 넘친다. 요즘 기온이 떨어지는 아침마다 녀석에게 옷 하나 더 입히려고 엄마는 잔소리를 하고, 아이는 언제나 괜찮다며 가벼운 차림으로 휙 나가버린다.
아이가 어릴 때 기억 속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어린이대공원 물놀이장, 해수욕장, 워터파크, 캠핑장, 제주도, 괌, 하와이 등등. 햇살에 반짝이는 물방울과 바람에 흔들리며 빛나던 나뭇잎들과 함께 아이의 웃음소리도 반짝이며 흩어졌던 그 시간들. 여름이 힘겨운 체질의 나는 더운 날에 오히려 두문불출했던지라 그닥 추억이 없었다. 아이 덕에 내 인생에 여름의 빛나는 시간들이 새겨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덥고 피로하고 아이의 장애 때문에 힘든 고민도 많았던 시간이지만, 아이 키우며 그 정도 걱정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잘 버텨온 그 시간, 지나고 보니 푸근하고 흐뭇하다. 행복한 기억을 부지런히 만들며 지나온 그 시간에 감사하고, 나 자신에게도 토닥토닥 칭찬해 주고 싶다.
나의 인생도 가을로 접어들었고, 아이는 훌쩍 커진 덩치만큼 자신의 세계를가 넓혀 가고 있다. 얼마 전, 새로 바뀐 교육제도와 입시설명회를 다녀온 날 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는지 머리가 하얗게 백발로 변해버린 꿈을 꾸었다. 가을이 깊어 서리가 내리는 시기가 내게도 온 것일까. 겨울이 오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래도 괜찮다. 충만하게 빛나는 여름을 보냈으니, 나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답다. 후배에게도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으나 미처 하지 못했다. 스스로 경험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다만,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몸은 편안해 질 거라고만 해두었다. 부디 그녀가 이 눈부신 인생의 여름을 좀 더 즐기며 지내길. 가을이 오기 전 좀 더 긴 여름을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