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아파트, 특히 101동은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다. 경기가 끝을 모르고 바닥을 칠 때도 유일하게 자신의 위엄을 꿋꿋이 세워, 건실함을 뿜어내던 곳이었다. 그런데 행복만 가득할 것 같은 이곳에서 112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것도 자살시도.
태신지구대 역시 긴급신고 하나로, 색이 바뀌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두들 사이, 영수도 바로 태세를 전환한다. 움켜쥔 무전기와 112 신고시스템에 고정시킨 시선으로 의자를 당겨 앉는다. 이윽고 긴박한 상황은 손바닥만 한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다.
“순찰차 1호는 현장 출발.”
“순찰차 2호, 3호는 현장 관리차 출발”
“소방에 공동대응 요청하겠습니다.”
영수는 서둘러 소방에 요청을 시도하려 수화기를 들었고 그 순간, 흘러나온 순찰차 1호의 무전에 영수는 모든 것을 멈췄다.
“신원미상 여성, 호화아파트 101동 화단에서 발견.”
서둘러 정신을 차린 영수는 수화기 너머로 상황을 전달하고 긴급출동을 요청했다. 이윽고무전기를 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요동치는 심장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던 영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앎에도, 서둘러 현장으로 발길을 닿을 수밖에 없었다.
101동 1204호. 서늘한 가슴 끝을 붙잡고 차갑게 닫힌 문 앞에 서,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는 그 경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친 두드림뿐이었다.
"꽝. 꽝. 꽝. 아무도 없나요?"
그제야, 얇은 반뿔테 안경의 차가운 중년 남성은 불쾌한 표정으로 영수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무슨 일인데, 우리 집을 이렇게 두드리는 겁니까?”
“당신 따님 집에 있습니까? 이름이 이아영 맞나요?”
“네. 왜 묻는 거죠?”
“휴. 방에 가보세요. 따님 있는지.”
중년남성은 놀란 표정으로 헐레벌떡 딸의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방향을 잃은 듯 제각각 던져진 남성의 실내화에는 그의 뒤늦은 미안함과 후회가 가득이었다.
영수는 그의 벗겨진 실내화를 한편에 모아놓고 조용히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대리석은 영수의 시선을 멈추게 했고, 파노라마창에 비친 한강의 물결은 유독 시렸다. 발길을 옮긴 피해자 방은, 온기가 여전했으나, 마지막 인사조차 남기지 않은 공허함이 가득했다. 이내 창틀 앞에 주저앉은 피해자의 아버지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딱딱한 창틀에 걸터앉았을 그녀의 심정을 영수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의 공허함이, 어쩌면 기댈 수 없는 미래보다 나아지지 않을 거란 사무침이 그녀를 창끝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영수도 한때는 세속적 기준의 ‘부’를 쫓던 때가 있었다. 넉넉함은 가족과 더불어 자신까지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 마음으로 가족을 등지고 오롯이 쫓던 허상은 어느 날 영수를 집어삼켰고, 그 앞에 놓인 것은 회복할 수 없는 건강뿐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중년 남성은, 오늘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에게 휘몰아칠 고난을 그가 잘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어쩌면 그는 잃고서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란 것을.
22살 꽃이 졌다.
코스모스 가득한 화단과 차디찬 시멘트 턱 경계에 걸쳐 누운 피해자에게 다가갔다. 젊음을 숨길 수 없는 앳된 그녀에게 드리운 옅은 그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빛을 잃지 않은 저릿한 입술에 영수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