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부성애

좁혀지는 거리

by 김혜민
“네가 알아서 해. 책임도 네가 다 지고.
난 이제 관심 끊을 거야.”


미친놈.

내 안의 분노가 더러운 말로 표출된 건,

이때부터 시작이다.




아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난제로 우린 갈라섰다.


하루종일 알 수 없는 종알거림으로 놀던 아이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먹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입에 가져다 확인하는 모습에, 소리를 쳐야 삭혔다.
갑작스러운 눈 가림의 이유를 말할 수 없음을 인지함에도 ‘왜!’를 물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 답답함을 가중하기라도 하듯 ‘왜’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아이를 보고,
차라리 외면해야만 살 것처럼 비쳤다.


해결책이 없는 정답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남편의 모습에, 결국 엔딩은 격한 싸움뿐이었다.




시후에 대한 믿음이,

올곧음을 넘어 억척스러워 혼자 애썼다.


둘째가 태어나고 함께 치료센터를 다녔다.

무더운 여름날, 돌쟁이 둘째를 데리고 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갑자기 화장실을 가단 날에는, 좁디좁은 화장실 한 칸에 우린 함께 했다.


한 손은 둘째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마무리를 돕던 그때의 꿉꿉함과 불쾌함에 분노의 눈물이 솟았다.

‘아 진짜 힘드네.’

그날의 온도와 냄새는 평생 잊지 못한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모르던 것이 앎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무섭게 모든 것이 변한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실은 아닌 것도, 그 테두리에만 발을 얹으면 맞는 것이 돼버리는 오류가 발생한다.


지난 시간, 남편은 그런 과정을 겪어 왔던 것이다.


이따금 남편이 아이와 마주 보고 웃을 때,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낮은 가능성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여보, 시후 3살 때 내가 승진시험을 포기하고 돌봤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왜?”

“그동안은 답답해서 외면했는데, 갑자기 시후한테 미안하더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그리고 여보 요즘 아이들한테 잘하잖아”

“부족하지. 이번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어디 놀러 갈지 찾아봐야겠다.”


불현듯, 뜬금없이 넘겨준 말이었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으니깐.

그냥 그 마음의 변화가 감사했다.




남편은 그동안 순간순간의 아이에 집중하기보다

먼 훗날의 시후를 걱정했다.

우리가 없을 먼 훗날.

그래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보다

가혹하게 아이를 세상에 내보냈었다.

그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았으나 시리고 서러웠다.


아직도 아들의 섬세함에 익숙지 않아 그 선을 건드리기도 한다.

“아빠 시러해!”라고 내뱉는 모진 아들에게

“괜찮아. 아빤 시후 좋아해!”하며 끌어안는다.

그리고 아들의 관심사를 훤히 깨고 있다.

“아빠랑 동물 놀이하자.”

“아빠는 하마하고 시후는 호랑이 할게.”

“크앙.”

몸을 뒤엉켜 물고 안기고 한다. 애증의 관계다.



어쩌면, 여전히.

내적갈등과 아비로서 부성애가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습자지에 물이 흡수되듯, 천천히 그리고 깊게 젖어듦을 확신하기에 기다리려 한다.


"당신이 처음 자폐란 말을 꺼냈을 때 분노했고, 아이를 외면했을 때 치를 떨었어. 그렇게 마음이 닫혔었지."
"미안해. 갑자기 주어진 상황이 너무 버거워서 회피하고 싶었나 봐."
"웅 그땐 내 마음이 그랬어."
"그렇지. 근데 애쓰는 시후가 안쓰럽더라고.
내가 여태껏 못한 거 더 살뜰히 챙길게.
나도 아빠가 처음이라 미숙했어. 미안해."


타인의 다름을 이해해 주는 일, 쉽지 않다.

그런데 겪어보니 더 어려운 것은

그 오롯이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이,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아이일 때였다.


아들, 아빠가 서툴렀지.
내가 이제 너의 나무가 되어줄게.



이전 08화아빌리파이정 1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