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감정선이 풍부한 그는, 육퇴 후 함께 즐기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기에 아이들의 이른 취침을 기다리며 낮부터 부단히 노력한다. 동물부터 공룡, 공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캐릭터를 소화하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주저함 없이 함께하는 열정적 아빠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난다. 그렇게 보낸 알찬 하루는 따뜻한 끼니와 만나 마음과 뱃속까지 포만감으로 가득 채운다. 이내 창밖은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볼록 올라온 배와 열심히 뛰어논 하루가 안겨준 피로감에 누구 할 것 없이 늘어지는 저녁, 남편의 시간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오늘은 어떤 드라마와 메뉴로 22시 30분을 즐길 것인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찾기 바쁘다. 그리고 내 곁에 다가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동의를 갈망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 없는 나지만 크게 동요치 않고 행복한 미소로 이 드라마, 저 드라마를 설명하는 그의 속삭임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삐-하는 외마디 이명소리뿐이다.
그러나 그는 설렘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행복은 이렇게 소소한 것임을 다시 느낀다. 그나저나, 요즘 왜 이리 재밌는 드라마가 많은지 나도 슬쩍 흔들린다.
“그만 붙어있고 좀 나가라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주말은 그 자체만으로 벅차지만 더 벅찬 누군가가 있다. 바로 어른아이다.
감기로 새벽 틈틈이 깨는 시율이는 아직 요일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주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06:30. “엄마 나가자.”
일방적 말덩어리를 툭 던지고 내 손을 끌어당기는 아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더듬더듬 나오는 길에, 어느새 아이는 내 핸드폰까지 챙겨 나오는 섬세함을 가졌다. 그렇게 이른 새벽부터 주말 하루가 시작된다.
학교를 안 가는 주말, 식사 한 끼 더 추가된다.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최근 쑥쑥 자라는 만큼,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시후의 기분을 아침부터 망칠 수 없기에 기상과 함께 아침밥을 준비한다.
그렇게 평일보다 바쁜 주말이다. 그러나 시곗바늘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그래도 저녁이 오고 밤이 온다. 그러나 그리 기쁘지 않다. 육퇴 후 어른아이와 함께할 일과로 나의 하루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파에 기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오롯이 김선아 연기에 몰입하는 그, 딴짓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뒤 소파에 누워 핸드폰에 시선을 맞추고 김선아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이다.
자정이 넘어가는 지금, 드디어 오늘 나의 일과는 끝이 났다. 침대에 오롯이 홀로 누운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뭐든지 함께 하고 싶은 남자 혼자의 시간이 필요한 여자
일요일 저녁 결국 사달이 났다. 주말 내내 끈적한 껌 마냥 붙어있던 그에게 좀 나갔다 오라는 말에, 드라마 좀 혼자 보라는 말에 결국 극단적인 말을 내뱉는 그다.
“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으면서 왜 사는 거야?”
지나치게 섬세한 그에게, 지나치게 무심한 난,
말문이 막혔다.그날 밤 우린, 한 공간에서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혼자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여리고 성격 급한 그는, 겨우 얻은 혼자만의 시간을 길게 내주지 않았다.
“화해해.”
피식 웃으며 내게 건넨 그의 따뜻한 손을, 악수인 듯 아닌 듯감정을 담아 꾹 잡았다.
“안아줘.” “싫어. 나 아직 안 풀렸거든. 그리고 이젠 좀 혼자 해. 이상한 남자야.” “싫은데!”
지구대 근무할 때, 주말이면 가정폭력 신고가 급증했었다. 명절이 껴있는 연휴는 더더욱 상승폭이 컸다. 그 현장에서 느꼈던 이유 모를 안쓰러움을 이젠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경찰부부의 주말도 여느 집 가정의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일을 크게 안 만들기 위해 급하게 화해 모드로 전환할 뿐이다.
가끔 생각했고, 이따금 그에게 건넸다.
나 아닌, 당신과 같은 결에 사람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혼이 맞지 않은내가, 지금까지 안락한 울타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가 나의 배우자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