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터.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꽃은 로맨스 소설에서도 한 번씩 등장하는 소품이다. 어렸을 적 봤던 순정만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바라보며 꽃을 닮은 소녀라고 비유했다. ‘코스모스를 닮은 소녀여.’ 여자 주인공을 보며 읊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여자가 얼마나 여리고 아름다울지 예상이 된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에서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여주인공을 꽃으로 비유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트렌드가 바뀌었으니까. 소설 속에서 꽃은 현실 속에서 활용되는 것처럼 여주인공에게 사귀자는 프러포즈를 할 때나 여자의 부모님 집에 찾아갈 때 예비 장모님께 드리는 선물로 쓰인다.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 한 주인공은 경찰이었다. 여주인공은 자신에게 적극적인 남자를 그다지 내켜하지 않아서 다음번에도 우연히 만나면 사귀겠노라 말을 한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남자는 범인을 잡으면서 다쳤던 팔에 피가 흐르면서도 근처 꽃집에서 붉은 장미 꽃다발을 사 와 그녀에게 바치면서 말을 한다. ‘다음번에 우연히 만나면 나랑 사귀어준다고 했지? 이제 나랑 사귀어줘.’ 팔에 뚝뚝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장미를 바라보며 여자는 둘 사이의 운명을 느낀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참 설레었다. 작가들은 소품 하나도 잘 활용할 줄 안다.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와서 사귀자는 말을 하다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반해서 적극적으로 쫓아다닌다. 당신과 나는 이렇게 운명이다 하면서.
아름다운 장미만큼 또 인상적이었던 소설 속의 꽃은 해바라기였다. 다른 소설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주인공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비 오는 날 노란 우산을 쓰고 곤란했던 자신을 도와준 여자. 그녀는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고 남자만 기억하다가 다시 재회 후에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사귀게 된 후로 여주인공에게 해바라기를 한 송이씩 선물한다. ‘당신을 떠올릴 때면 이 꽃이 생각나.’ 하면서 건네주는 꽃이 늘어날 때마다 여자의 사랑도 점점 더 커진다.
나는 남편이 남자 친구였던 시절에, 내게 꽃을 선물하자 “돈 아깝게~ 다음부턴 사지 마.” 이런 말을 했더랬다. 그때의 내 입을 꼬집어주고 싶다. 그 뒤로 남편은 잊지도 않고 절대 꽃을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항상 “고마워요.” 이 말만 했어야 했는데, 남주인공은 재벌이고, 나의 남편은 가난해서 그 말이 안 나왔던 걸까. 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예비 장모님께 꽃다발을 안기는 장면은 대부분 여성들의 워너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센스쟁이! 로맨스 소설 작가들이 대부분 여자이니, 이건 정말 여자들이 꿈꾸는 환상인가 보다. 사랑하는 남자가 꽃다발을 준비해서 나의 엄마에게 안겨드리는 것. 보통 눈치가 아니고선 준비하기 어렵다. 결혼하기 전에 이런 장면들을 읽으라고 책을 주던지 했어야 했는데. 결혼 후에도 내 남편은 장모님께도 꽃을 선물할 줄 모른다. 하아, 눈물 좀 닦고. 앞으로라도 좀 가르쳐야겠다.
로맨스 소설은 환상이 가득하다. 이 환상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여자들이 바라는 소망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꽃 한 송이에도 현실과 소설은 거리가 있다. 그 간격을 넓히는 것도 좁히는 것도 바로 소설을 읽는 나이다. 원하는 걸 침만 흘리며 속으로만 삭히지 말고, 남편에게 옆구리라도 찌르며 말해보련다.
“오늘은 예쁜 꽃다발을 사들고 와줘. 맛있는 밥 차려줄게.”